정읍역 샘고을시장

옛 모습 그대로 쇠를 다루는 대장간과 3대째 전통악기를 만든다는 장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잊혀가는 것들이 그리울 때는 정읍역 샘고을시장의 정취만한 것도 없다. 

 

 

<악학궤범>에 실려, 한글로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의 옛 노래, ‘정읍사(井 邑詞)’는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아름다움과 그리움으로 멋지게 묘사된 것이 아니라 불안과 조바심으로 흔들리는 애절한 여심이다. 이난영의 가락처럼, 그런 한스러움이 오랜 민중의 사랑을 받는 생명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읍사에 나오는 ‘저잣거리’를 여기 전라북도 정읍 사람들은 ‘샘고을시장’으로 믿고 있다. 이곳에 장이 섰다는 기록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도 남아 있다.

근래 들어서는 정읍역이 1912년 개통되고 2년 뒤인 1914년 본격적인 시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으니, 그로부터 보아도 100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정읍역 가까이는 시장이 2개 있다. 역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연지시장(신시장)이 있고, 샘고을시장(구시장)은 2km쯤 가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으면 연지시장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958년 장옥을 열어 60여 년 된 전통시장으로 막걸리, 순대, 떡 같은 먹을거리와 농축수산물, 건어물 같은 것을 판다. 국밥은 ‘연지 순대국밥’ 집이 유명하고, 가게 이름에서 웃음이 묻어나오는 ‘아들 딸 사랑한다’ 집은 매운 갈비를 알아준다.

1시간 이상 여유가 있으면, 샘고을시장에 들러보기를 권한다. 걸어가면 20분, 택시를 타면 5분이 걸린다. 축구장 5개 면적에 들어가는 문이 ‘13문’까지 있다. 점포는 400여 개에 달한다.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지학사)에도 나오는데, 부산 자갈치시장, 대구 서문시장, 옥천 우시장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 전통시장으로 소개되어 있다.

두루두루 봐도 되지만, 시장이 커서 헷갈리기 쉬우니, 일단 중앙 쪽 ‘100년 광장’을 찾아서 중심을 잡는 것이 좋다.

북서쪽으로는 시장이 확대되면서 생긴 영역으로 채소, 청과, 수산, 정육점 등이 즐비하다. 오랜 내력을 갖고 있는 곳은 시장의 남쪽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일단 배를 채워야 하는데 순대국밥집 ‘화순옥’이 3대째 70년 전통을 자랑한다. 그냥 국밥은 6000원, 막창 국밥은 8000원이다. 고기도 많고 진한 국물 맛이 좋다.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이름난 옛날 팥죽집들이 곳곳에 자리 하고, 드문드문 칼국수, 쑥개떡, 호떡집들도 눈에 띈다.

샘고을시장 역시 팔고 사는 물건들이 여느 시장과 대체로 비슷하지만, 다른 시장에는 없는 꼭 봐둬야 할 곳이 몇군데 있다. 먼저 ‘유기전(鍮器廛)’이다.

원래 유기전은 밥그릇, 제기 따위의 놋그릇을 파는 곳이다. 시장 복판에 세곳 남아 있는데, 지금은 징과 꽹과리를 비롯해 장구, 북 등 국악기를 판다. ‘전승명가’를 운영하고 있는 서인석 씨(60)는 조부로부터 3대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악기장이다. 서씨는 “단단하고 울림이 좋은 오동나무를 직접 깎아 장구와 북의 틀을 만들고, 거기에 소가죽이나 개가죽을 씌워서 악기를 완성한다”라면서 “국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악기들이 대량으로 팔려 나간다”라고 말했다. 전통의 명맥을 잇는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유기전 뒷골목에 또 하나 놓치지 않아야 할 곳이 대장간이다. 다 사라지고 ‘정읍민속대장간’ 하나 남았다. 대장간은 다섯이 한 조(組)로 일한다. 집게, 풀무, 그리고 메질이다. 풀무가 바람으로 온도조절을 해서 벌겋게 달군 쇠를 집게로 꺼내 올리면, 세 사람이 메를 들고 메질을 해서 쇠의 형상을 만든다.

메질은 양쪽에서 때려야 하니, 꼭 왼손 잡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낫과 괭이, 호미, 삽 같은 농기구를 만드는 데, 옛 방식으로 일하면 다섯의 인건비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더구나 값싼 중국산이 밀려오는 판국에, 대장간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이다.

지금은 가스 가마에 메질은 기계가 하고, 주인이 혼자 집게잡이를 하며 근근이 꾸려가고 있다고 한다. 한 군데 더 들러야 할 곳은 솜틀집이다. 2문 앞에 자리한 ‘대양솜집’. 목화가 한쪽에 쌓여 있고, 씨 빼는 기계, 솜타는 기계가 있는 곳. 예전에는 혼사 앞두고 꼭 들러야 할 곳이, 지금은 뜸하다. 오래되고 놀린 솜이불을 다시 타서 가뿐한 새 이불로 다시 만들어 가는 손님들이 간혹 찾을 뿐. 주인 이영만 씨 (65)는 목화가 이불이 되어 나오는 과정을 한번 보여준다. 마루에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는 듯한 그 풍경은 반세기의 세월이 멈춰 선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을 준다.

나는 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시장에 웬 미용실이 저렇게 많은지 의문이 들었는 데, 상인회에서 일하는 김옥실 씨(53)가 그것을 풀어준다. “떡 찧고, 기름 짜러 방앗간에 오잖아요? 그럼 서너 시간 걸려요. 그사이에 뭐 하겠어요? 미용실에 가서 파마하고 수다 좀 떨고 가면 딱맞지요.” 방앗간에 검은 머리 꼬불꼬불한 할매들이 그렇게 많이 앉아 있는 데는, 그런 비밀이 숨어 있었다. 시장에는 방앗간이 15개, 미용실이 15개로 정확히 같은 수가 영업 중이었다. 장사라는 것이 역시 물속을 꿰어야지, 허투루 되는 것이 아니다.

정읍사의 고향 정읍역에 내리거든 내장산과 내소사, 선운사,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과거와 현재가 생동하고 있는 샘고을시장에도 꼭 들러볼 일이다. 설을 앞두고 시장은 대목을 향해 가느라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이광이(동화작가) 사진 최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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