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 송정역시장 둘러보기

서민의 애환과 희망이 어우러진 삶의 공간. ‘지키기 위한 변화’에 성공한 광주의 전통시장으로 떠난다.

 

 


‘역(驛)’은 멈추는 곳이다. 도착해서 멈추고 새로 출발하는 곳, 역에서 끝과 시작은 다시 이어진다. 조정의 공문을 실은 파발마(馬)가 먼 길을 달려오다 잠시 멈춰 물(睪)을 마시고는 다시 떠나는 곳이 역(驛)이었다. 그래서 못이 있는 곳에 역은 자리했다. 역은 늘 오가는 사람들로 부산했으므로, 그 앞에 ‘장(場)’이 섰다.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장은 삶의 마당이었다. 농사지어 쌀가마니 메고 장에 가서 쇠고기와 찬거리를 바꿔오기 위해서는, 길을 떠나고 역과 장이라는 저 여정을 비켜 갈 수 없다.

‘1913송정역시장’은 역과 시장의 밀접한 관계를 그 이름으로 잘 보여준다. 1913은 역사다. 1914년 호남선이 개통되기 1년 전 목포-송정리 구간이 먼저 개통되던 그해 시장이 덩달아 생겨난 것이다. ‘역전시장’으로 태어난 송정역시장은 올해로 106년의 나이를 먹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까지 너른 평야와 풍부한 강물 덕분에 농산물 거래가 활발했고, 우시장이 성시를 이뤘다.

시장 건너편으로 떡갈비 골목이 유명한데, 소 갈빗살과 다른 부위를 섞어 잘게 다지고 양념을 해서 시루떡처럼 구운 달달한 떡갈비는 그런 우시장의 산물이다. 송정역시장은 그런대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는다. 미군부대 이전에 따라 유흥시설이 정비되고, 대형마트들이 들어서면서 시장은 기능을 상실했다. 10여 년 동안 그야말로 ‘죽은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광주광역시와 현대카드가 합심하여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옛것을 살리고 새로 짓고, 상인들 서비스 교육까지 시켜서 다시 살려낸 것이 오늘의 송정역시장이다. 2015년 가을 2개 시범 점포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2016년 4월 18일 170m 거리에 재단장한 64개 점포가 일제히 개장함으로써 송정역시장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다.


송정역시장 초입에는 커다란 시계가 돌아가고 있다. 오른쪽에 영광굴비, 현대 식육점, 신흥상회, 고흥상회, 산수모밀, 매일제분소가 쭉 늘어서 있고, 왼쪽에 태형식품, 현대국밥, 영명국밥, 우량제분소, 역서사소, 갱소년 가게가 줄지어 있다. 간판들이 옛 글씨 그대로다.

바닥에는 그 가게가 문을 연 연도가 금형 판에 양각되어 있다. 시장엔 장사가 잘되는 집도 있고 덜 되는 집도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가장 인기 있는 집이 ‘또아식빵’이 아닐까 싶다.

빵 나오는 시간이 문 앞 칠판에 적혀 있는데, 빵을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한정 없이 길다. ‘고로케삼촌’ 집도 유명하다. 우리 밀로 손수 만든 고로케, 기름기를 쏙 뺀 담백함과 쫄깃한 식감이 비결이라고 한다. ‘마카롱상점’은 크림과 잼을 얹은 빵집인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다. ‘머글꼬지?’ 집은 닭을 직접 손질해서 양념소스를 얹은 닭꼬치, 거기에 참깨 드레싱이 화룡점정이다. ‘역서사소’는 역사책을 파는 곳이 아니라, ‘여기서 사세요’라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로,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문구류 소품을 판다.

필자는 어슬렁거리다가 ‘역전(驛煎)’ 가게에 들러 막걸리를 한 잔 했다. 역전(驛前)을 한 글자 바꿔 ‘전(煎)’으로 쓴 아이디어가 기발하다. 주인은 정유석 씨로 친구와 같이 창업했다.

“요리사의 자존심을 걸고 일합니다. 모든 것을 직접 만들어 팔아요. 막걸리 종류도 많습니다. 천장을 유리로 만들었는데, 비 오면 비가 유리에 튕기는 모습이 보이고 들립니다. 비 오면 생각나는 것이 파전하고 막걸리 아닙니까?” 그래서 비가 오면 손님이 최고 많다. 장사를 잘해서 기사식당, 아귀찜집, 파스타 레스토랑, 이렇게 3개 식당을 동시에 운영 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상인회장은 김인섭 씨가 맡고 있다. 김씨는 동갑내기 부인 박삼순 씨와 ‘개미네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시장의 터줏대감이다. 부인은 열아홉에 미용실을 시작해서 40여 년을 시장에서 살았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시장이 어려울 때는 가게 팔고 이사 가려고, 다른 터를 보러 다니기도 했다.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려달라”고 했더니, 지금이 제일 재미있고, 행복하단다. “장사하는 사람에게 기쁘고 재미난 일이 뭐겠어요? 손님이 많이 오는 거지요. 젊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반갑고, 많이 팔고, 돈도 벌고, 살면서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다 죽어가던 시장을 살려준 그 사람들의 은혜를 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장 가운데쯤 송정역의 ‘제2대합실’이 있다. 화장실과 물품보관함을 갖춘 쉼터인데 열차시각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거기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발차시각은 얼마나 남았는지, 다음 열차는 언제 오는지 알 수 있다. 역과 장이 합치된 공간으로, 이 시장을 재탄생시킨 프로의 솜씨가 느껴진다. 전통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팔고 사는 곳이 아니라 서민의 애환과 희망이 어우러진 삶의 공간이라는 따뜻한 눈길이 시장 곳곳에 배어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수많은 전통시장이 완행열차처럼 구겨져 버린 시대에, 100년의 시간을 오롯이 간직하며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지키기 위한 변화’에 성공한 ‘1913송정역시장’이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광이(동화작가) 사진 최배문

 

 


 

 

 

SRT매거진 페이스북으로 이동

SRT매거진 인스타그램으로 이동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