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희, 당신은 누구신가요

한국 음악사에 이토록 무수한 업적을 남긴 이가 또 있을까. 천재적 음악성과 지도력, 예술혼까지 가진 전무후무한 국악 명인 지영희(池瑛熙·1909∼1980).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이름이 낯설기만 하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우리 소리에 정작 우리가 너무 무심했던 건 아닐까. 선생을 만나러 평택에 가야 하는 뚜렷한 이유가 지금 생긴 것 같다. 

 

시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는 지영희 선생
지영희 선생은 다이내믹을 표현하려고 팔을 자주 사용하면서 고개를 함께 갸우뚱했다고 한다. 국악관현악단 지휘 때는 사모관대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택이 낳은 ‘쌍피리 신동’
지영희 선생의 고향이 경기도 평택이라는 사실은, 평택에 사는 사람들조차 잘 모르지 않을까 싶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포승면 내기리. 천대받는 무속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 세습무가로서 무당과 음악인이 많아 어깨너머로 피리와 태평소를 배울 수 있었다. 10살이 되기도 전, ‘쌍피리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마을의 풍물패가 앞다퉈 선생을 모셔갔고, 굿판에서도 피리잽이로 나서 달라는 요청이 쏟아졌다.
일찍이 평택은 농업이 발달했고 아산만의 바다를 품고 있어 두레소리(농요)와 뱃소리(어로요), 상여소리(장례요) 등 우리의 소리가 발달했다. 평택은 또한 모든 물자가 드나드는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배가 평택에 닿는 첫 번째 포구가 바로 선생이 태어난 포승면 내기리였다. 당시 평택에서는 가장 큰 시장에 사람들이 모이고 남사당패가 몰려와 놀이판이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더구나 인근 바다에 사람들이 배를 타고 조업을 나가면서 사고로 죽는 일이 빈번했던 터라 굿이 자연스레 성행하게 됐다.
이렇듯 굿과 농악이 크게 발달했던 평택은 민속음악과 무속음악의 성지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바로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있었기에 민속음악의 거장은 탄생할 수 있었다. 평택은 ‘근대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를 있게 한 그의 고향이자, 선생이 평생을 바쳐 수호하고자 했던 우리 소리의 원점이다.

 

내가 가서 그 음악을 살려야 해
선생은 1937년 평택을 떠나 경성 조선음악연구소에 입소해 악사가 되고, 이듬해 한성준무용단의 반주 악사로 활약한다. 이때 한성준 선생에게 춤을 배운 것을 계기로 조선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1940년대에 들어서는 조선 최고의 춤꾼 최승희와 국내외를 누비며 공연을 펼쳤다. 광복 후에는 국악원 총무로 활동하며 향토민요제전, 농악경연대회, 민속무용대회를 열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 ‘국악인재 양성의 성지’로 불리는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한다.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고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 초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1972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뉴욕 카네기 홀에서 공연도 했다.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예능보 유자로 지정됐다.
이런 대외적인 모습 외에도 선생이 우리 국악을 위해 쏟은 노력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우선 현대 악보가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에 오선 악보를 채보했다. 특히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민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7년간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각지를 누비며 사라져가는 우리 민속음악을 채집하고 기록했다. 덕분에 ‘강강술래’, ’매화타령’, ‘오광대춤 놀이’ 등 수많은 곡이 민요로 살아남았다.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는 데에도 몰두했다. 현종, 비파, 아쟁 등의 악기를 개량해 다양한 음색을 창조해냈다. 국악 관현악의 위치와 배치, 악기법 등 악기마다 교본을 직접 만들어 체계화한 것도 선생이었다. ‘만춘곡’, ’휘모리’ 등 다양한 국악 창작곡을 만들어 국악 오케스트라 연주가 가능해졌다. 국악의 현대화, 나아가 국악의 국제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이처럼 우리 음악사에서 민족음악을 지켜낸 영웅임에도 그의 이름이 아직까지 낯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유신정권의 무속철폐문화와 국악협회의 일방적 제명으로 수많은 업적이 매장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아침 신문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2호 시나위 보유자 지영희 국악협회 제명’이라는 기사를 본 선생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하와이로 떠났다.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도 선생은 한국에 있는 자녀와 통화를 할 때면 늘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경기도의 무속음악이 있는데 그게 사라질 거야. 내가 가서 그 음악을 살려야 해.” 고국의 국악인들이 그를 버렸는데도 그의 삶엔 오로지 국악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 렸다고 한다. 하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선생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1980년 향년 72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지영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는 듯했다.

 

1972년 3월 25일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마치고 커튼 콜에 답하고 있는 지영희 선생의 모습 (좌측부터 김윤덕, 지영희, 김소희, 성금연 명인)

 

다시 부활한 선생의 얼
다행스러운 것은 평택시가 지영희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평택의 소리와 멋, 이곳 출신 예인들의 공로와 가치를 조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평택호관광단지 내에 산책로를 ‘소리길’로 조성했다. 이 길에서는 지영희 선생의 예술혼과 작품세계를 담은 소리의자와 비주얼페인팅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15년 6월, 평택호관광단지 내 한국소리터에 ‘지영희국악관’을 건립했다. 선생이 사용했던 악기, 직접 쓴 악보 등 선생이 연구한 음악적 흔적은 물론, 선생의 업적을 평가하는 각종 문헌 자료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웃다리평택농악, 평택민요 등 평택의 전통예술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코너도 마련했다.
지영희 선생은 소리와 악기, 연주와 창작, 그리고 악단의 문화산업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미친 음악가였다. 채보가로, 작곡가로, 지휘자로, 악기개량가로서 한 시대가 이루려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을 해냈다. 한평생을 오롯이 민족의 가락을 보듬으며 살아온 지영희 선생. 그의 이름 석 자를 우리의 가슴 한 편에 새길 기회가 앞으로 더 많아지길 바란다.

지영희 선생의 친필 악보

 

지영희국악관
평택이 낳은 ‘근대 국악의 아버지’ 지영희를 소개하는 전시관. 국악계에 있어 매우 가치가 크고 희귀한 다량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소리길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만나볼 수 있다. 지영희 선생이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소리, 평택의 얼을 직접 체험해 볼 기회를 놓치지 말자!
10:00~17:00 (월요일 휴관)|무료|경기 평택시 현덕면 평택호길 147|031-8024-8689

소리길 투어
지영희와 행복한 소리동행 지영희 선생으로 분장한 문화해설사를 따라 신나게 국악 공연을 체험해보는 프로그램. 정확한 일정은 전화로 문의할 것.
소리길투어(소리의자와 비주얼페인팅 감상)→전시 및 공연관람(해설 및 해금공연 감상)→이론교육(워크북풀기)→해금체험 및 기념사진 촬영|031-8024-8689

 

 

 

변현주 협조 민속원, 지영희국악관 참고도서 노동은 <지영희평전> (민속원, 2015)

 

 

 


 

 

 

SRT매거진 페이스북으로 이동

SRT매거진 인스타그램으로 이동

SHAR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