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나태주, 고향은 또다시 나를 떠나게 한다

AS TIME GOES BY | 작가의 고향을 찾아#6

젊을 때는 절망을, 나이 들어서는 비애를 주는 곳.
푸릇한 풀내음을 담은 시가 돋아난 고장.
고향 충남 서천은 그런 곳이다.

나태주 사진 손준석

 

내가 지금 머물러 살고 있는 고장은 충남 공주다. 그러나 태어난 고향은 서천이다. 공주와 서천 사이.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지만 그 거리에 아득한 마음이 안개처럼 서린다. 얼마나 나는 이 길을 오가며 살았던가. 열여섯 나이부터 시작해서 일흔여섯 이니 60년 세월이다.
공주와 서천 사이. 예전엔 버스가 하루에도 여러대 오갔는데 이제는 하루에 한 대밖에 오가지 않는다. 그만큼 공주에 살면서 서천과 관련 있는 사람이 없다는 증거이고 오가는 사람이 드물다는 얘기다. 굳이 고향 서천을 찾으려면 공주역에서 기차를 타고 익산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는 길이 첩경이다.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다. 변한 세상이 참 낯설고 섭섭하다. 그것은 정작 고향 서천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분명 고향이라고 찾아왔지만 얼굴 아는 사람 없고 이름 불러주는 사람 또한 없다. 옛사 람들 말에는 변하는 건 사람이요, 여전한 건 산천 이라 했지만 산천도 결코 예전의 산천이 아니다.
뭣보다도 길이 놀랍도록 많이 달라졌다. 필경 자동차로 가는 길인데 자동차가 데려다주는 길이 영판 다르다. 주변 분위기도 다르고 마을 모습도 다르고 보이는 산야 풍경조차 다르다. 그러니 공기 조차 다른 것 같고 우러르는 하늘조차 다르게 느껴진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예전의 기억 속으로 더듬어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 여기가 집터였지. 여기는 길이고 저기에 나무들이 서 있었고 아, 우물은 그대로 있네. 마을의 생명줄이던 우물. 이제는 철판 뚜껑을 머리에 이고 깊은 잠에 빠진 우물. 우물 속같은 기억을 더듬어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은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있던 친가집이 아니고 외할머니와 둘이서만 살던 외갓집이다. 마을 사람 들이 꼬작집이라고 부르던 오막살이 초가집. 울타 리도 없고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나 딸린 집. 거기서 나는 초등학생 시절까지 살았다. 서향집.

아침 해가 등 뒤로 뜨고 저녁 해가 앞으로 졌다. 그래서 아침 시간이 짧고 저녁 시간이 길었던 집. 지대가 높아 문을 열고 바라보면 동네의 집들이 모두 내려다보였다. 마을 길을 오가는 사람들까지 환히 보였다. 특히 앞쪽으로 천방산이 제대로 잘 보였다. 천방 산은 서천군에서는 제일 높은 산. 그 산을 바라보 면서 나는 저 산 너머 어디쯤 바다란 것이 있고 넓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바닷물에 저녁 해가 이글거리며 빠질 것이라고 꿈꾸곤 했다.

정작 내가 천방산에 오른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때. 천방산 아래 절골 마을 외딴집에 사촌 이모네 집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무남독녀 외동이었으므로 이모들도 사촌 이모들인데 세 분 이모들 가운데 맏이인 동옥이 이모가 제일로 나에게 잘해 주었다.

4학년 가을날이었던가 보다. 혼자서 찾아간 나를 위해 동옥이 이모는 개암 열매도 따주고 고구마도 쪄주곤 했다. 외할머니네 집에서 먹던 붉은 껍질의 고구마가 아니라 하얀 껍질의 고구마였다. 산비탈 거친 밭에서 자란 고구마라 그랬던가, 포실포실한 맛이 참 달고도 좋았다. 처음 먹어본 하얀 고구마. 그것은 나중 한 번도 먹어본 일이 없는 고구마였다.

그때 사촌 이모는 나더러 좀 높은 곳으로 가서 장항제련소 굴뚝을 보자고 했다. 맑은 날이면 그 깊은 산골에서도 멀리 떨어진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보인다 했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우리나라 공업의 상징이면서 한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굴뚝으로 이름이 높았었다.

유엔의 운크라(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에서 만들어준 퍼런 색깔 마분지 표지의 초등학교 4학년 사회과 책에 그렇게 소개되어 있었다. 정말로 그 장항제련소 굴뚝이 보일까? 영주야(시인의 본명), 보인다 보여. 저기 좀 봐. 저게 장항제련소 굴뚝이란다. 동옥이 이모가 손가락으로 가리 키는 하늘 멀리 수직으로 선 물체가 보였다. 그것이 바로 내가 처음 본 장항제련소 굴뚝이었다.

장항제련소 굴뚝은 나에게 먼 세상으로의 꿈을 심어주었다. 그래, 나도 저곳에 가 봐야지. 그래서 저 것을 잘 바라보아야지. 그것은 나의 마음이 멀리 까지 나아가는 순간이었고 나의 인생이 먼 세상으로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나의 삶은 세상을 떠도는 삶이었고 낯선 것을 찾는 삶이었다.

하룬들 편한 날이 있고 하룬들 만족스러운 날이 있었을까. 날마다 고달프고 미진한 날들. 그것의 연속. 또 그것이 모여 76년 나의 인생이 되었다. 멀리서만 바라보았지 한 번도 가까이는 가 보지 못한 장항제련소 굴뚝처럼 나의 인생은 마냥 겉돌고 멀찍이 건너다보기만 하던 날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어린 날이 좋았다. 어린 날나의 어린 영혼을 받들어 키워준 고향. 나에게 고향은 한 마을이 아니고 두 개의 마을로 다가온다. 외가 마을과 친가 마을. 명시적으로 말하면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와 기산면 막동리. 시골길 20리 (약 8km) 를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늘날 공주와 서천 사이 어디쯤 나의 그리움과 서성임이 살고 있듯이, 어린 시절에는 외가 마을과 친가 마을 사이에 나의 외로움과 방황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외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 같은 것. 모성에 대한 정체성이 자주 흔들리곤 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대로 시인 으로 한평생 살라는 운명 같은 것이 그 시절 이미 배태된 것이리라. 외가에서 살다가 친가로 돌아간 것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가에서 3년 서천읍에 있는 서천중학교까지 장장 왕복 16km를 꼬박 걸어서 통학을 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어렴풋이 알게 된 사람이 서천 출신의 신석초 시인이었다. 그리고 2학년 2학기몇 달 동안 서천에서 하숙 생활을 했는데 함께 하숙한 허근이란 동급생한테서 전해 들은 시인 이름이 박목월이었고, 또 그분의 시 ‘산이 날 에워싸 고’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직 시인을 꿈꾸는 아이가 아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공주로 나가 공주사범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엉뚱하 게도 시인이 되고자 했다. 한 여학생을 만나 그 여학생에게 반하는 바람에 답답한 속내를 그 무엇 으로도 풀 수가 없어 시를 읽고 시를 쓰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선생이나 안내자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혀 자연 발생의 일이었다. 그러한 나에게 공주는 신천지였고 맨 처음 경험한 도시였고 서구 문명을 처음 배운 고장이었다. 이담에 자라 어른이 되면 공주에 와서 살아야지 소원을 세운 것도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리하여 공주는 고향 서천과 함께 나에게 아주 중요한 고장이 되었 다. 공주와 서천 사이 오락가락하는 마음은 꼭 어린 시절 외갓집과 친갓집 사이 느끼던 그 괴리와도 닮았다.

내가 다시 고향 서천에서 살게 된 것은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의 일이다. 19세의 나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경기도의 한 학교에서 몇 년근무하다가 육군에 입대하여 3년 또 복무하고 다시 경기도의 초등학교로 복직하여 1년 살다가 고향의 학교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1970년도의 일.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귀향이 아니라 억지로 마지못해서 이루어진 귀향이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경기도로 돌아갔을 때의 나이는 25세.

결혼이란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 학교에서 마음에 드는 여교사를 만났던 것이다. 그 여교사에 혹해 적극적으로 프러포즈를 했는데 끝내 거절당해 심하게 상처를 입고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신음 하는 꼴이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손을 써서 고향의 학교로 나를 불러 내린 것이다. 돌아온 고향. 고향 학교. 하지만 그 모두는 나에게 마냥 썰렁하고 낯설 기만 했다.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고 교사로서도 퇴출 직전으로 불성실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하게 살고 싶었다. 나락의 길이 깊었으므로 삶에 대한 의지 또한 강렬했다.

바로 그 어름에 나는 시인이 되었다. 조금쯤 마음이 오갔던 사람을 옆자리에 앉혀두고 다른 남자와 맞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온 그여교사. 경기도에 두고 온 그녀. 그때는 그렇게 원망스럽고 안타까웠는데 멀리 떠나오고 나니 그래도 그녀가 몹시도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 바로 나의 등단작이다.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이것은 1971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당선한 시 ‘대숲 아래서’란 작품의 일부다. 그러나 나는 이 가운데서도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는 표현이 많이 쑥스럽고 불만스러웠 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또 나의 진심 인걸 어쩌랴. 어찌 다른 말로 바꿀 수 있으랴.

이 작품은 고향의 어법이 나에게 준 선물과 같은 것이다. 어려서 어른들로부터 귀에 익도록 들어온 낱말들이 어울려 조그만 꽃송이를 이룬 것이 이작품이다. 그만큼 고향의 말과 고향의 정서와 어법은 시인에게 소중하다. 내 고향 서천은 나에게 시인에의 꿈을 심어주고 시인으로의 출발을 약속 해준 땅이다.

그로부터 8년 6개월 동안 나는 고향 서천에서 교사로 살았고 젊은 시인으로 살았다. 주변에서 알아주거나 인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혼자서 당당했고 혼자서 행복했 다. 오직 읽었고 오직 시 쓰기에 매달렸다. 많이, 오래, 외톨이였지만 마음속에 싱그러운 시의 풀밭이 있었기로 그 또한 좋았다.

그렇게 살다가 다시 찾아온 곳이 오늘날까지 머물러 살고 있는 고장, 공주다. 그 뒤부터 서천은 늙고 병약하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고 때때로 급한 마음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곳이고 갈수록 멀어지는 고장이다. 그러하다. 소실점처럼 아득한 곳이다.

이제야 생각해본다. 나의 고향 서천은 나에게 어떤 곳이었던가? 젊은 시절엔 나에게 소망도 주었 지만 절망도 주었다. 비록 20대 중반에 돌아온 고향이지만 그냥 이대로는 주저앉을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그 어떤 갈급함을 주었다. 그래서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이 든 사람으로 찾아가는 고향은 절망감보다는 비애감을 준다. 내가 진정 꿈꾼 것은 무엇이고 내가 진정 이룬 것은 무엇인가? 또나름대로 성취한 것이라 해도 과연 그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이고 오늘날 어떤 보람인 가! 생각은 갈수록 복잡해지지만 그래도 나는 성경의 ‘네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 말씀처럼 과감하게 고향 서천을 떠나 공주에 정착한 30대 초반의 용기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하고 고맙게 여긴다.

한국인 누구나 비슷한 감회겠지만 내 고향 서천은 나에게 충분히 아름다운 고장이고 향기로운 고장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외할머니 따라서 간 장항 읍내의 밝은 전등불 빛. 역시 초등학교 소풍으로 갔었던 목은 이색 선생의 산소. 오늘의 문헌서원. 잠시 장항중앙초등학교 교사로 아내와 함께 살았던 다시 장항. 장항역. 가난한 시절 아내와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찾았던 동백정.

그러고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산장과 한산 모시와 한산 소곡주다. 어머니가 1주일 동안 토굴에 들어가 짠 베 한 필. 새벽에만 선다는 한산장 모시전에 나가 모시 판 돈을 소곡주 값으로 모두 날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젊은 시절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말없이 보아주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 그아버지 어머니를 내 어찌 모른다 하랴. 돌아보면 아득히 두 세상 산 것 같고 남의 인생 같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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