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보다, 너 보다 _ 강릉에서 1박 2일

내가 좋아하는 강릉은 햇살 좋은 날의 깊고 진한 그늘과 같다.
시험을 풀듯 세웠던 여행 계획 대신 그저 바다를 보다, 너를 보다 하였다.
람이 불어도 따듯하고 줄을 서지 않아도 맛있다.

 

잠하던 동해바다가 사나워질 거라고, 강추위에 콧날이 매울 거라고 예고했지만 강릉은 ‘문 안에 서서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일침을 가하듯 떠나온 곳에 비해 한없이 따뜻했다. 그럼에도 겨울이라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맹렬히 달려드는 안목해변에는 많은 사람이 나와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들이 무리 지어 파도를 쫓다 뒷걸음치고, 쫓다 뒷걸음치며 웃는다. 삼각대를 놓고 서로의 사진을 남기는 연인들, 아장아장 모래밭을 걷는 아이와 부모가 겨울 바다에 도착했다.

현재 카페거리로도 통하는 안목해변에는 오래전 커피자판기가 무수했단다. 겨울 바다와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면 도통 상실되지 않는 기억에 약으로 쓰이리. 제 정신으로는 오히려 못 살 것 같은 9시 뉴스와 함께 오늘이 지나고 있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바위를 깎아내린다고 해도 파도는 나쁘지 않고 바위는 파도보다 낮지 않은데, 오직 사람만이 저보다 쓸모없음을 판단하여 입 안에 낫을 든다. ‘너보다 잘난 나, 나보다 못난 너’ 찍어 누를 때 제 속에 더 큰 생채기가 나는 걸 그는 언제쯤 알게 될까?

“그대여, 겨울 바다에 서 보라. 파도에 의해 바위가 돌멩이가 되고, 모래가 되고,
바다의 한 부분이 되는 걸 보라. 속절없이 당해주고도 당당한 쓸모가 되라.”

른이 되고 처음 찾았던 강릉은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참 그림 같았다. 그날은 비가 왔었는데 추운지도 모르고, 제 갈 길도 잘 모른 채 하염없이 걸어도 마냥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강릉은 햇살 좋은 날의 깊고 진한 그늘과 같다. 제2의 제주도 강릉에서 이제 그런 시간과 공간은 애써 만들어야 얻을 수 있다. 강릉에 가야지 마음먹고는 이곳저곳을 여행리스트에 올렸는데, 막상 강릉에서는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가는 여정이었다. 이름을 만방에 떨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줄을 서야만 먹을 수 있는 식당이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에 맞장구칠 정도로 사람들로 촘촘한 카페에서는 본연의 나도 잊고, 본연의 맛도 못 느끼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강릉에 와서 기대한 맛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 모든 충만함은 따뜻한 배에서 나오니까.

하나씩 지워나갔던 여행 리스트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았던 곳. 두 해 전 여름이었을 것이다. 두 어른과 함께 강릉 현지인의 추천으로 남항진 해변에 있는 ‘병산감자옹심이’라는 식당을 가게 됐다. “감자를 먹을래, 고구마를 먹을래?” 하면 무조건 고구마인 나는 식당 이름부터 ‘감자’인 것이 영 달갑지 않았었다. 다행히 메뉴판에 ‘장칼국수’가 있어 모두가 ‘감자옹심이’를 주문할 때도 나는 장칼국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 맛이나 보라는 권유에 예의로 한 술 뜬 감자옹심이는 장칼국수보다 참 내 입맛이었다. 이후 강릉에 갈 때마다 지인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하는 식당과 메뉴가 생겼다. 감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 사람에게 반전 매력을 보여주고 싶다면, 남항진 해변으로 발길을 돌리세요.

걸음 뒤에서 바라보고, 느긋하게 걸었다. 안목해변에서 강진해변에 이르는 길은 바다만큼 소나무 숲이 짙고 푸르러 산책 나온 시민도 많다. 하늘 닿을 듯 이 높은 소나무를 조선시대 허난설헌도 보았을까? 하는 것은 강릉에 올 때마다 하는 상상이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면 게스트하우스가 정답이다. 그러나 깊은 잠이 들고 싶다면 호텔이 더할 나위 없겠다.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면 철썩이고, 철썩이는 바다의 노래가 황홀하다. 낮에도, 해가 진 뒤에도 해변에서 사람들은 떠날 줄 몰랐다. 우리의 하루는 때로 바다를 보는 자체로 충만해진다. 작고 소중한 것들로 채워나가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해가 고개를 떨굴 즈음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야 내 시간을 만난 것 같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초당타르트’라는 카페를 찾으러 나섰다. 낮이나 주말에는 그 많은 손님들로 꽉 찰 카페를 구석구석 돌아보아도 야단이 없으니 한껏 여유를 부리고 싶다. 테이블 위에 커피와 에그타르트를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붉은 스탠드와 초록 식물, 둥그런 테이블 위에 커피와 타르트, 나만의 시간을 근사하게 하는 것들. 자꾸만 잡음을 일으키는 배 속 소음을 잠재우려 일어섰다. 카페를 오는 길에 우연히 ‘불고기’를 간판으로 내세운 식당을 두 군데나 발견했다. 강릉을 여행하며 처음 들른 식당(강릉불고기 초당점)에서 기분 좋게 배부른 식사를 했다. 나는 아직도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많이 먹어보지 못했다. 편협한 시야에 갇혀 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곳도 여태 많다. 더 넓고 깊은 시간이 어디선가 확실히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가자. 내가 몰랐던 그곳으로.

글, 사진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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