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이어라, 제주

겨울이라고 센 체하는 코끝 시린 바람과 하루가 멀다 하고 경고음을 울려대는 미세먼지에서 탈출했다. 그저 비행기만 타고한 시간을 날아갔을 뿐인데, 제주에는 연분홍 동백꽃이 지천에 깔렸다. 탐스러운 하귤도 주렁주렁 열렸다. 벌써 봄이 속삭이는 섬, 우리가 제주로 떠나야 하는 이유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제주에 와야겠다.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동백꽃의 꽃말을 이곳에서 전하고 싶다.

서울의 겨울, 참 길고 춥다. 기상청에서는 연일 영하 10℃ 안팎의 한파주의보를 내리고 미세먼지 수치는 ‘나쁨’을 벗어나지 않는다. 어디를 가더라도 춥긴 마찬가지. 정녕 뜨뜻한(!) 방구석이 최고인 걸까. 그런데 제주에 동백이 피었다는 소식이다. 그것도 12월부터 2월까지가 절정이라니 어찌 놓칠쏘냐. 이번 여행의 주인공은 동백이다. 동백꽃을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다는, 대충 찍어도 인생샷을 보장한다는 위미 제주 동백수목원과 휴애리자연생활공원을 목적지로 정하고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달려갔다. 역시나 동백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는 입구. 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지 벌써부터 설렌다. 위미 제주동백수목원은 어른 키를 훌쩍 넘는 4~5m 높이의 애기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농장 주인이 약 40년간 가꿔 공개한 곳으로 동글동글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연분홍 동백꽃이 빠끔히 고개를 내민다. 휴애리자연생활공원은 동백올레길을 시작으로 매화정원, 동백정원 등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돼지와 거위, 염소, 조랑말 등과 함께하는 체험도 할 수 있다. 2월에는 매화마저 절정을 이룬단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예쁜 꽃봉오리를 터뜨려주니 이리 고마울 수가. 제주 하면 유채꽃을 떠올리곤 했는데, 이젠 아니올시다. 동백꽃이니라.

눈부신 햇살에 반짝거리는 제주 바다를 보니 이대로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동백만 보고 떠나려던 일정을 바꿔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부터 제주올레길을 걸었다. 제주 서귀포 남원포구에서 시작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5코스. 총 13.4km 거리의 5코스에는 위미동백나무군락도 포함되어 또다시 연분홍 꽃봉오리를 만날 기대에 부푼다.

제주올레길, 바다를 따라 걸으며 길가에 핀 이름 모를 야생화를 구경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오징 어에 군침을 삼킨다. 낚시를 즐기는 어르신, 동네를 어슬렁 거리는 강아지, 어느 지점에 다다라서는 해녀 할머니도 우연히 만났다. 까만 고무 잠수복을 입고 주홍색 테왁과 촘촘한 망사리를 들고 물질을 나선 할머니들의 걸음이 어찌나 빠르시던지, 결국 따라잡기는커녕 시야에서도 놓치고 말았으니 젊은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제주올레길 5코스의 백미를 꼽으라면 1.5km 길이의 큰엉해양경승지다. ‘엉’은 제주도 사투리로 ‘언덕’을 뜻하고, 커다란 바위 덩어리들이 바다를 집어 삼킬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 하여 ‘큰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안길을 따라 걸으면 바다 쪽으로는 검은 빛깔의 기암절 벽이, 육지쪽으로는 자연 숲 터널이 펼쳐지며 숲과 하늘, 바다가 만나 ‘한반도’ 지도를 그리는 독특한 풍경도 감상할 수있다. 중간중간 탁 트인 바다로 통하는 길과 잠시 쉬어갈 수있는 벤치까지 마련되었으니 큰엉해양경승지만 걸어도 ‘힐링’은 제대로다.

완주하겠다는 목표는 애초에 없었다. 걷다 보면 지칠 수도 있고, 괜스레 마음이 동하는 풍경 앞에 머물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하염없이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어떤 풍경이 나올까. 그다음이, 또 그다음이 궁금해지니 어쩔 도리가 없다. 차를 타면 그냥 지나칠 풍경도 걷다 보면 되돌아보게 된다. 서울촌년 눈에 포착된 정체불명의 노란 열매가 그랬다. 거리 곳곳, 초록빛 나무 사이로 탐스럽게 열린 열매는 줄기를 축 늘어뜨릴 만큼 제법 묵직하다. 도대체 이름이 뭘까.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하귤’이라 알려준다. 금방이라도 껍질을 까면 과육이 터질 듯한 탐스러운 자태지만 3월에 익 기 시작해 여름에 먹는 귤이란다. 지금 먹으면 그저 떫은맛 뿐이라고. 그래도 호기심에 따 먹는 사람이 많은지 여기저기 경고문이 붙었다. 안 돼요, 잠시 참아요. 여름에 양보하세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걸음은 5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쇠소 깍을 지나서야 멈췄다. 후련함과 뿌듯함이 교차하는 순간, 카페 테라로사에 앉아 여기서 직접 재배한 귤로 만들었다는 새콤한 하우스 주스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나눈다.


동백 찬란한 제주, 걸으며 행복했던 제주. 다시 돌아오는 날엔 푸르디푸른 여름과 단풍 가득한 가을 풍경이 기다리고 있길 바라며 봄날 같은 제주 여행은 여기서 안녕!

김정원 사진 황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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