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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가족을 미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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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우리는 왜 가족을 미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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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재상봉’ 속 떨떠름한 얼굴에 담긴 우리의 모습.

📌전원경(세종사이버대 교양학부 교수)
예술작품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예술 전문 작가



“우리는 가족을 늘 원망하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가 하면, 또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게 가족이야.”


언젠가 한 영어소설에서 읽은 구절이다. 가족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은 우리나 서양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명절은 이런 ‘가족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폭발하는 시기다. 소위 ‘명절 증후군’을 앓는 며느리, 아내의 스트레스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남편, ‘어느 대학 갔느냐? 어디 취직했냐? 결혼은 언제 할 거냐?’처럼 악의는 없지만 별로 영양가도 없는 친척들의 질문 공세에 시달려야 하는 자녀들에게 명절은 차라리 괴로운 연례행사에 가깝다.


대체 누구를 위해 명절 때마다 고생해 가면서 모이고, 또 그리 궁금하지도 않은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의 ‘가족의 재상봉’은 이처럼 기쁘다기보다는 차라리 떨떠름하게 재회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제법 널찍한 집 정원에 열한 명의 가족이 모여 있다. 모임의 중심에 나이 든 부부가 자리 잡고 있는 걸로 보아 이들은 장성한 자녀들과 그들의 부모인 모양이다. 하나같이 잘 차려입은 모습이 이 가족의 부유함을 말해준다.


남자들은 모닝코트에 실크햇을 갖춰 입었고, 여자들은 당시 최신 유행이던 흰색 야회복 차림이다. 막 파티가 끝난 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달갑지 않은 모습으로 그림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가족의 재상봉. 프레데릭 바지유, 1876년, 캔버스에 유채, 152 x 230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그림의 제목은 왜 ‘가족의 재상봉’인 걸까? 아마도 이 가족의 자녀들 중에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방탕하게 살고 있는 아들이 있는 모양이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아들이 집안의 큰 행사를 맞아서 모처럼 시골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워낙 말썽꾸러기인 아들이라 다른 식구들은 이 아들의 등장이 반갑기보다는 차라리 당혹스럽다. 완고한 아버지는 그런 아들은 내 알 바 없다는 듯이 아예 시선조차 돌리지 않는다. 가족의 당황스러운, 또는 놀랍거나 달갑지 않은 감정들이 환한 초여름 햇살 아래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 속 장면은 이 작품을 그린 화가 프레데릭 바지유가 처한 현실과 엇비슷하다. 바지유는 몽펠리에에서 부유한 와인 양조업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성공한 와인상이자 지역 유지였던 바지유의 아버지는 큰아들을 의사로 키우겠다는 꿈을 안고 파리로 보냈다. 그런데 파리에서 의대에 다니던 바지유는 의학보다도 미술 공부에 빠져들었다. 화가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 바지유는 아버지가 보낸 넉넉한 하숙자금으로 동료 학생들인 르누아르, 모네, 시슬리 등의 재료비·생활비를 내주었고 그들의 그림을 샀다. 그림을 그릴 공간이 부족한 친구들을 위해 몽마르트르 근처의 라콩다민 거리에 넓은 화실을 빌려 함께 쓰기도 했다. 결국 바지유는 의사가 되기 위한 최종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이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느라 의학 공부를 게을리한 걸 알고 노발대발했다.
‘가족의 재상봉’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바지유의 실제 가족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림의 배경 역시 바지유 일가가 소유한 몽펠리에 인근 여름 별장의 정원이다. 어쩌면 이 그림은 미술을 선택하면서 부모와 껄끄러운 사이가 된 바지유의 심정을 담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바지유는 그림의 왼쪽 끄트머리에 보일 듯 말 듯 자신의 모습도 그려 넣었다. 막상 가족 모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자신의 초상만 빼놓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미처 피지 못한 젊은 화가의 재능
바지유는 이 그림을 2년 가까이 손질해서 1867년 완성한 후, 이듬해 프랑스의 국전인 살롱전에 출품했다. 당시는 화가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루트가 살롱전이어서 입상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다. 그런데 동료들은 모두 낙선하고 바지유의 ‘가족의 재상봉’만이 덜컥 입선해 버렸다.


이 결과에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지유였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그와 달리, 모네와 르누아르는 전업 화가였고 훨씬 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바지유는 “심사위원단이 실수한 모양”이라며 친구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선배 화가인 피사로는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자네는 우리 중에서 가장 재능 있는 친구가 분명해.”


그러나 이 출중한 재능은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1870년에 터진 보불전쟁에 참전한 바지유는 그해 전선에서 전사했다.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였다. 바지유가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물론 1874년의 1회 인상파전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후 인상파를 주도하는 화가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가족의 재상봉’에서는 야외의 테라스에 비친 햇빛과 그늘의 효과를 주의 깊게 관찰한 흔적들이 엿보인다. 엇비슷한 시기에 모네가 그랬듯이 말이다.


바지유의 덧없는 죽음처럼, 가족이라는 관계는 영원해 보여도 실은 영원할 수 없는 관계다. 가족이라는 형태는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에 더 가깝다. 결혼과 죽음으로 결별하는 순간을 결국 맞게 된다. 이 결별의 순간은 어쩌면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올 수도 있다. 그런 유한성을 생각하면, 가족의 한마디에 노여워하고 상처받기보다는 조금 더 무심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그저 사랑하고 기뻐하고 행복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을 사는 인생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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