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사이트

봄볕처럼 스쳐 가버린 사랑

기본 정보
상품명 봄볕처럼 스쳐 가버린 사랑
상품요약정보 문화 인사이트
휴스 ‘4월의 사랑’에서 읽는 슬픔.

📌전원경(세종사이버대 교양학부 교수)
예술작품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알려주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예술 전문 작가

4월의 사랑. 아서 휴스, 1855년, 캔버스에 유채, 88.5 x 49.5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화사한 꽃과 봄의 밝은 햇살, 그리고 사랑의 감정. 절묘하게 어울리는 이 세 가지 요소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가 결코 오래갈 수 없다는 점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열흘 붉은 꽃이 없는 법이고 축복 같은 봄 햇살은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 역시 덧없기로 따지자면 꽃이나 봄 햇살 못지않게 허무하고 또 허망하다.


테이트 브리튼이 소장하고 있는 아서 휴스(Arthur Hughes, 1832~1915)의 ‘4월의 사랑’은 이 세 가지 요소를 하나로 묶어 그림으로 형상화한 듯한 작품이다. 그림은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막 소녀에서 숙녀로 넘어가는 시기일 듯한 처녀가 담쟁이넝쿨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보라색 드레스 위에 하늘하늘한 숄을 걸친 이 처녀는 분명 거울을 보고 열심히 꾸민 듯한 모습이다. 상아처럼 하얀 팔에는 보랏빛 리본이 앙증맞게 매어져 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채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공들인 치장과는 달리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다.


‘4월의 사랑’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 그림은 어떤 이야기, 사랑과 관련된 사연을 담고 있다. ‘4월의 사랑’을 그린 아서 휴스는 흔히 ‘라파엘 전파’라고 불리는 19세기 중반 영국 화가들의 동맹에 소속되었던 화가였다. ‘라파엘 전파’라는 명칭은 사실 알쏭달쏭한 면이 있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이끈 위대한 화가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천재적인 재능에 잘생긴 외모, 더구나 싹싹한 성격까지
갖춘 라파엘로를 몹시 총애해서 그에게 추기경 직위를 내리려고 했지만, 그가 37세의 한창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최초의 ‘화가 출신 추기경’은 탄생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라파엘로와 아무 연관도 없는 19세기 중반 영국 화가들의 작품에 ‘라파엘 전파’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일까?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는 영어의 ‘pre’라는 표현 그대로 ‘라파엘 이전’의 화풍으로 돌아가자는 것을 모토로 한 영국 화가들의 동맹이다. 1848년 영국 로열 아카데미 출신인 존 에버렛 밀레이,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 이 세 명의 화가는 기존 영국의 미술 풍토, 즉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고전적 화풍을 모방하는 그림이 아닌, 라파엘 이전인 중세 시대의 미술을 본보기 삼아 도덕적이고 문학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원칙 아래 ‘라파엘 전파’를 결성했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물에 빠져 죽는 오필리아의 모습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리고 중세 화가들의 단골 주제가 성모마리아였듯이, 라파엘 전파 화가들 역시 아름다운 여성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단순히 그림의 주제로만 삼지 않고 그 모델들과 무수한 염문을 뿌렸다는 점이 중세 화가들과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차이라면 큰 차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경향 때문에 라파엘 전파의 작품들은 특정한 사연, 즉 성서와 문학작품, 중세의 전설, 또는 시의 한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이처럼 그림 속에 숨겨진 스토리를 찾는 것은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쏠쏠한 재미가 된다.


‘4월의 사랑’을 그린 아서 휴스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밀레이와 헌트를 만나 이들의 형제동맹에 가담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세 살 연상인 밀레이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5년에 그린 ‘4월의 사랑’ 역시 밀레이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이 그림의 주제는 ‘엇갈린 사랑’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주인공의 뒤편, 오른 팔 근처에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인다. 처녀는 자신의 발치께에 떨어진 분홍 꽃잎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포즈는 떨어져 버린 꽃잎처럼 자신의 사랑이 이른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수수께끼처럼 보이던 이 그림의 설정도 이해될 듯하다. 양갓집의 처녀일 그림 속 주인공은 자신의 뒤편에 앉아 있는 청년과 비밀스러운 사랑을 키워오고 있었을 것이다. 남자는 4월의 어느 날, 여자를 숲속의 밀회 장소로 불러낸다. 윤기 흐르는 보라색 드레스와 공들여 손질한 헤어스타일을 보면 그녀는 이 만남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막상 어렵게 만난 연인은 심각한 말다툼을 벌이고, 남자는 절망한 모습으로 여자 뒤편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여자는 두 사람의 차이가 메울 수 없는 심각한 엇갈림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며 덧없이 떨어진 꽃잎들을 망연히 바라본다. 한때는 싱그러웠던 두 사람의 사랑이 이제 시든 꽃잎처럼 종말을 고할 때가 왔음을 실감하면서.

휴스는 이 그림의 모티브를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방앗간 집 처녀 (The Miller’s Daughter)’에서 따 왔다고 한다.


사랑은 소용돌이치는 상처
사랑은 희미한 후회
나른한 눈에 고인 눈물
여전히 남아 있는 기억들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잊을 수 있을까?
아, 그래도 잊을 순 없어.

4월의 인상은 아마도 이 그림이 담아낸 사랑의 실체처럼 싱그러운, 그러나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짧은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림 속 처녀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하지만, 막 피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의 초록 이파리에 둘러싸인 그녀의 모습은 봄의 꽃처럼 아름답다. 이 점은 화가가 다분히 의도한 부분이다. 휴스는 처녀를 둘러싸고 있는 담쟁이 이파리의 묘사에 많은 공을 들였다. 금방이라도 한들거리며 흩날릴 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초록 이파리들은 막 무르익는 봄의 느낌을 주며 처녀의 보랏빛 스커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초록색과 보라색의 선명한 대비 덕분에 처녀는 담쟁이덩굴 사이에서 피어난 꽃처럼 보인다. 젊음이든 꽃이든 사랑이든 간에, 아름다운 것들은 영속하지 않는 법이다. 잠깐 피어났다 덧없이 시들어버린 그림 속의 사랑처럼, 4월의 아련한 햇살은 늘 우리 곁을 쏜살같이 스쳐 지나간다.


KEYWOR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