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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더 글로리> 속
사적 복수를 논할 자격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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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명 드라마 <더 글로리> 속
사적 복수를 논할 자격에 대하여
상품요약정보 시사 인사이트
드라마 <더 글로리>가 미성년자 시청불가인 이유.

📌오찬호(칼럼니스트)
사회가 상식적이어야 개인도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회학자. 제주에서 책을 읽고 쓰며 산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복수극이다. (3월 공개 예정인) 후반부를 보지 않고 글을 쓰고 있지만,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진득하고 처절하게 뭉개버리는 내용이라는 건 다 안다. 그만큼 주제가 강렬하고 표현은 선명하다. 사회의 깊은 고름을 극적으로 구성했기에 사람들은 집중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논의를 확장시킨다면, 드라마의 사회적 가치는 커진다. 그리고 그게 ‘모두들 복수합시다!’는 아닐 거다.


김은숙 작가는 이 작품이 19세 관람가인 이유를, 정당한 사법 체계 안에서의 접근이 아닌 ‘사적 복수’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제작발표회에서 밝혔다. 최소한 사적 복수를 왜 문명화된 사회공동체에서 금지하는지를 이해하고 드라마의 함의를 곱씹어 달라는 뜻이었다. 픽션이 선사하는 통쾌함에 짜릿하게 젖는 것만으로 사적 복수라는 키워드가 다뤄져선 안 될 거라는 우려였을 거다.

복수가 다뤄질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덩어리는 ‘사회 시스템의 부재’다. 피해자를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피해자가 공적 도움을 받지 못하니 홀로 칼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식이다. 특히나 ‘어린’ 피해자에겐 더 난관이었을 거다. 보호자의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면, 도움을 청한들 소용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면서 크는 거다’라는 관념이 많은 곳이라면, 이걸 말해봤자 자신만 상처받을 거라면서 포기했을 거다. ‘인생에 쉬운 것만 있겠냐, 이겨내야지’라는 가혹한 철학이 동기부여 명언이랍시고 부유하는 세상이라면, 피해자는 나약한 자신을 자책할 거다.

당한 이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어이없는 학교폭력 예방책은 실제로 많았다. 친구들이 별명을 부르며 놀리면, 거기에 익숙해지라는 교육청 자료도 있었고 해코지가 두려우면, 큰길로 다니라는 캠페인 광고도 있었다. 이처럼 폭력을 저지르지 말라가 아닌, 당하지 말라는 측면으로서만 예방이 언급되니, 가해자는 별다른 압박 없이 가해자로 살아간다. 이런 비상식적인 세상 모습에 분노하기에 많은 이가 사적 복수의 ‘배경’에 공감한다.

사적 복수를 꿈꾸게 만든 건 누구?
하지만 짚어야 할 것은 그 세상은 누가 만들었냐는 거다. 어떤 사회는 어떤 개인들의 입김이 뭉쳐진 결과다. 학교폭력은 가해자에게 집중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주목하는 ‘여럿’ 없이 설명될 수 없기에 ‘사회’ 문제다. 시스템의 부재로 개인이 저럴 수밖에 없다는 논의는 ‘그러니까’ 사회를 정교하게 만들어가자, 그것을 방해하는 고정관념을 경계하자는 토론으로 이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개인의 삶을 방해하는 구조적 차원을 생각해 보자고 하면 ‘사회 탓하지 말라’는 대꾸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이어지는 ‘누구는 안 힘들었냐’는 식의 대답은 개인의 고통을 개인적으로 머무르게 만들어버린다. 한국에서 가난하면 그게 개인의 생애에 지독한 부메랑이 되지만, 가난 탓을 해선 안 된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선 어떤 외모는 가혹한
평가 대상이 되지만, 이를 하소연한들 돌아오는 대답은 살부터 빼라는 거다.

마지막으로 짚어야 할 것은 사적 복수의 배경이 계속 이해되다 보면, ‘사회가 해결하지 않는다’면서 복수가 정당화되는 현실이 삐죽삐죽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에서는 참교육이라는 추임새가 남발하는 서사가 인기 콘텐츠가 된 지 오래되었다. 얌체주차를 한 차의 앞뒤를 다른 차들로 막아버리고 이를 공유할 정도로 떳떳하다. 주차장을 자기 것처럼 사용하면서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차주를 누가 두둔하겠는가. 하지만 무례함의 크기가 사회적으로 그어놓은 선을 넘어갈 이유가 될 수 없다. 층간소음 보복 스피커가 실제로 검색되고 판매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층간소음 유발자를 이해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대응의 끝에 슬기로운 마무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적 복수는 두 측면에서 금지되었다. 하나는 복수의 이유로 언급되는 상대의 잘못이 주관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손님 갑질을 떠올려보자. 그 손님들, 자신들 입장에서는 기분 나빠서 정당하게 되돌려주는 게 정의라고 생각한다. 학교폭력은 당연히 가해자가 잘못이지만 속살을 파헤쳐보면 자신이 ‘정당하게’ 복수한다고 착각한다. ‘맞을 짓 했지?’라는 추궁이 폭력의 전 단계에 등장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다른 하나는 이 주관적인 정의감도 차별적이라는 거다. 기분을 나쁘게 한 선행요인이 있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사적 복수를 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더 약자일 때만 정당화가 더 강해질 뿐이다. 이성 사이에 벌어지는 폭력이나 스토킹 등의 문제는 성별의 방향성이 뚜렷하다. 남성에서 여성 쪽으로 향한다. 그 반대는 쉽지 않다. 화난다고 다음 행동이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성별은 한다. 덜 무섭기 때문일 거다. 보복 운전도 마찬가지다. 보복 운전 당사자들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경차가 벤츠 막아서고 시비 걸고 트렁크에서 골프채 꺼내서 상대를 협박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물론 그반대는 많다. 그게 더러워서 큰 차 산다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던가. 사적 복수의 그럴 만한 이유가 무엇이든, 그 사회에 흐르는 그릇된 법칙은 힘이 더 세다.

억울하면 공부로 성공하면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여기에서 파생된다. 주인공이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가해자 딸의 담임이 되는 것으로 복수가 시작되는 <더 글로리>의 부작용을 꼽으라면 이것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공부라도 잘해야지 복수라도 할 거 아냐’라면서 동기부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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