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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통 엔진의 부활

기본 정보
상품명 12기통 엔진의 부활
상품요약정보 테크 인사이트
친환경 시대. 멸종이라는 벼랑 끝에서 새로운 가치를 내세워 변신한 12기통 엔진.

📌 김태영(모터 저널리스트)
과학과 공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을 즐기는 남자



현대의 자동차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한다. 그래서 이점도 많지만, 한편으론 피할 수 없는 부작용에 직면한다. 자동차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적 노력이 공교롭게도 지난 100여 년간 발전시킨 내연기관이라는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자동차 업계의 흐름은 몇 가지 큰 변화를 거쳤다. 지난 15년간 자동차 업계의 화두는 ‘친환경’과 ‘고효율’이었다. 지구 대기 오염의 원인인 이산화탄소(CO₂) 배출량을 본격적으로 줄이면서 같은 에너지(자원)로 더 멀리, 더 효과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여러 자동차 회사가 지난 수년간 엔진 배기량을 꾸준히 줄여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엔진을 다운사이징하는 방식은 제품마다 개념이 조금씩 다르지만, 덩치에 비해 엔진 배기량을 줄인 자동차, 그러면서도 각종 보완 기술로 고효율·고성능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 모두의 목표다. 그래서 중형차에 1.5L 터보 엔진을 얹거나 대형 세단에 2.0L 엔진+ 전기 모터를 접목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구축한다. 태생 자체가 연료의 효율성이 아니라, 운전 재미와 스릴을 추구했던 대형 스포츠카의 경우 실린더 크기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수십 년간 10~12기통으로 발전한 자연흡기 엔진 스포츠카가 8기통 터보로 진로를 바꾸거나 전기모터를 더한 하이브리드로 변신하는 모습이 흔하다.




과거 12기통 엔진이 자동차 기술의 결정체였던 시대가 있었다. 실린더에 피스톤 12개가 달린 엔진은 흥분한 말처럼 풍부한 토크(힘)를 강력하게 쏟아낸다. 엔진이 뿜어내는 깊이 있는 사운드와 진동이 기계적 감각의 절정을 맛보게 해준다. 12기통 엔진은 운전이라는 행위를 고귀하게 만들어줬다. 이런 대형 엔진을 자동차에 달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불편까지 감수하던 시대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고성능 전기모터, 다운사이징 엔진과 융합한 최첨단 기술이 활보하는 거리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은 필요 이상으로 과하고 거추장스럽다.


12기통 엔진은 그렇게 수년간 조용히 멸종하고 있었다. 이 분야의 대표 주자인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같은 스포츠카 브랜드조차도 이미 수년 전부터 다운사이징 시스템을 선보이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지난 수년간 조용히 강력한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 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과 해석으로 새로운 12기통 자동차를 선보이며 업계를 놀라게 했다. 페라리 ‘푸로산게’, 람보르기니 ‘레부엘토’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3~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글로벌 신차 테스트 드라이브에 참석한 나는 두 차의 면면을 보면서 12기통 엔진의 부활을 직접 확인했다.


진보를 넘어 혁신을 선택한 이유


페라리 푸로산게는 ‘75년 브랜드 역사상 최초의 4도어, 4인승 페라리’다. 가장 페라리다운 페라리를 목표로 만들어진 차로, 여느 스포츠카보다 키가 높은 디자인 덕분에 4명이 탈 수 있는 공간이 핵심이다. 동시에 스포츠 주행 성능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앞뒤 바퀴의 거리를 최대한 콤팩트하게 유지하면서 앞뒤 문이 안에서 밖으로, 마치 꽃잎처럼 활짝 열리는 형태로 디자인해서 넓은 승하차 공간을 확보했다.


푸로산게의 새로운 12기통 엔진은 이전과 결이 약간 달랐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일정하게 출력을 쏟아냈다. 엔진은 최대 출력 725마력(73.0kg·m)을 발휘한다. 강력한 엔진 성능을 바탕으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불과 3.3초, 최고 속도는 시속 310km에 달한다. 빠르다. 이 새로운 V12 엔진은 그동안 페라리가 선보인 트랙용 스포츠카와 세팅 방향이 다르다. 
전반적으로 묵직하고, 훨씬 부드럽다. 특정 구간에서 신경질적이지 않으며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많은 부분을 개선했다. 푸로산게에 얹힌 12기통 엔진은 패키지라는 관점, 즉 자동차의 모든 구조에 어울리는 조화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방향성이 사뭇 달랐다. 운전자를 위대한 드라이버로 만들기보다, 사려 깊고 지능적이며, 똑똑하다.

페라리가 12기통 엔진을 레이스 DNA가 아니라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재해석하는 동안 람보르기니는 좀 더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목표로 12기통 엔진을 손봤다. 전기 구동계를 더한 하이브리드 12기통 슈퍼카. 레부엘토는 미래형 슈퍼 스포츠카라는 설명이 부족하지 않다.

 
람보르기니는 이 차를 HPEV(하이 퍼포먼스 전기자동차)로 정의한다. ‘기존 12기통 엔진 스포츠카에 전기모터를 단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런 간단한 개념을 실현하려면 60년 이상 발전시켜온 구조에서 벗어나 새로운 설계가 필요했다.


신형 12기통 엔진은 과거 모델들 기준에서 180도 회전해 뒤를 보고 달린다. 자연스럽게 변속기가 자동차 중심이 아니라 엔진 바로 뒤, 차 뒤쪽으로 움직인다. 동시에 8단 변속기 상단에는 세 번째 모터가 결합해서 주행 상황에 맞춰 추가적인 출력을 제공한다. 맞다. 세 번째 모터다. 나머지 두 개의 모터는 자동차 앞바퀴 중심에 위치해서 좌우 바퀴에 독립적으로 동력을 전달한다. 전기모터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리튬이온 배터리 팩(3.8kWh)은 자동차 중앙에 세로로 길게 배치된다. 결과적으로 엔진의 최고 출력은 825마력. 전기모터 세 개가 합산된 시스템 출력은 1105마력에 달한다.


레부엘토를 만든 기술자에 따르면 이 차의 배기음은 이전보다 더 크고 우렁차다. 전동화와 친환경 규제에 맞춰 모든 스포츠카가 조용해지는 요즘 자동차 시장 분위기에 람보르기니는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고속도로에서 엄청난 사운드로 달리다가 시내에 들어설 때 순수 전기 모드로 전환해서 외부 소음 없이 조용히 지나갑니다. 미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레부엘토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루벤 모어 람보르기니 최고기술책임자의 말처럼 이 차는 극과 극을 넘나들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바탕에 두고 진화한 결과물이다. 이 세상 모든 스포츠카가 전동화로 변환될 때도, 가장 구식의 내연기관 엔진을 고집하는 브랜드가 페라리, 람보르기니일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세상의 마지막 내연기관 신차를 두 회사에서 만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구식’이란 표현은 틀렸다. 이들은 최첨단 기술을 끊임없이 개발할 뿐만 아니라 시장을 선도하는 기준을 만든다는 마인드로 슈퍼카를 만든다. 12기통 엔진은 이렇게 새로운 방식과 해석을 통해 조금씩 부활하고 있다.


효율만큼이나 감성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이해관계를 놓고 본다면 순수 전기차가 세상을 지배하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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