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빨간 기차를타고 달린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시속 600km로 달리는 초고속열차시대. 하지만 얼마나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느냐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느냐를 기대하게 만드는 기차가 있다.
꿀잠도 포기한 채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재미에 푹빠져드는 스위스 기차 여행.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이토록 아쉽다니,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

 

스위스 루가노, 냉정과 열정 사이

코끝으로 전해오는 공기부터 다르다. 뿌연 미세먼지가 일상이 된 서울을 벗어났으니 오죽하랴. 말 그대로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스위스 남부 티치노주에 위치한 루가노는 취리히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를 달리면 도착한다. 산중턱에 위치한 기차역은 전망대와 같다.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어 루가노를 처음 접하는 여행자에게는 설렘의 장소다. 대성당 너머로 오렌지빛깔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였 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푸른 호수를 둘러싼 도시. 한때 이곳은 이탈리아 땅이었단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탈리아와 구분도 잘되지 않는다. 19세기 후반 티치노주가 스위스 연합에 합류하면서 루가노도 스위스 영토가 되었는데, 여전히 이탈리아 건축과 문화가 남아 있고, 지역 주민도 대부분이 이탈리아 출신이라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며 살아간다. 스위스 하면 차가운 이미지를 떠올리곤 했는데, 루가 노는 달랐다. 스위스 속 이탈리아, 냉정과 열정 사이, 이 묘한 경계에 있다.

루가노의 심장은 구시가지의 리포르마 광장이다. 치비코 궁전이었던 루가노 시청과산 로코 교회, 노천카페들이 어우러진 공간 으로 골목골목 걷기 좋다. 광장은 채소시 장과도 통하고, 햄과 치즈, 살라미가 가득한 식료품 가게와도 연결되며, 고급 부티크 숍과도 이어진다. 크고 작은 상점이 이어지는 나싸 거리 끄트머리에는 16세기에 건축된 산타 마리아 델리 앙졸리 교회가 있다.

작다고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한때 수도원 이던 교회 내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제자 베르나르디노 루이니가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걸려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예수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역사 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현지인의 문화공간을 보고 싶다면 루가노 예술문화센터(LAC)를 추천한다. 티치노주 출신의 건축가 이바노 자놀라가 설계한 건물로 넓은 전시 공간과 극장, 콘서트홀 등을 갖췄고, 운이 좋으면 무료 공연도 즐길수 있다.

아쉽게도 관람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지만 건물 내부 통유리창 너머로 루가노 호수를 바라보는 기회를 얻었다. 햇살 때문인지 유리창 때문인지 유난히 반짝거 리는 호수. 이끌리듯 발걸음을 옮겨 호수를 따라 걷는다. 얼마나 걸었을까. 피로함을 느낄 새도 없이 꽃과 나무가 가득한 치아니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다 보니 불현듯 명화 한 점이 떠오른다.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그래, 서두를 필요 없지. 루가노에서는 잠시 게을러져도 좋다. 일요일 오후처럼 느긋하게!

본격적인 기차여행이 시작되는 아침. 스위스에서 꼭 체험해야 할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를 타기 위해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버스에 올랐다. 이탈리아 티라노까지 산과 호수를 끼고 돌아 3시간 정도가 걸린다기에 잠이나 청해야겠다 했는데, 웬걸,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한폭의 그림이다. 스위스를 여행하러 왔다가 이탈리아 풍경까지 덤으로 눈에 담았다.

아름답거나 아찔하거나,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이탈리아 국경의 작은 마을 티라노에서 출발한 베르니나 익스프레스가 한 정거장, 한정거장 스위스를 향해 달린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가 특별한 건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기 때문. 오스 트리아의 글로니츠와 뮈르츠슐라흐 구간을 연결하는 산악철도 제머링 라인(1998년 선정)과 인도의 뉴잘패구리와 다르질링을 연결하는 토이 트레인(1999년 선정)에 이어 철도 구간으로는 전 세계 딱 세 곳 밖에 없는 세계문화유산이며, 올해 유네스코 선정 10주년을 맞았다.

험준한 알프스 고개를 넘어 브루지오, 르프레세, 포스키아보 등 총 25개 역을 지나는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자연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많은 커브길과 구름다리를 설치해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다. 무려 407개의 커브길과 55개의 터널, 196개의 구름 다리를 지나는데, 그중 눈여겨 봐야 할 구간은 부르지오역을 부메랑처럼 360도 회전하는 브루지오 루프교(Brusio Circular Viaduct), 알프스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알프 그륌(Alp Grum), 해발 2253m까지 오르는 오스피치오 베르니나(Ospizio Bernina), 필리수르역 근처에 위치한 65m 높이의 아찔한 구름다리 란트바써 비아둑트(Landwasser Viaduct) 등이다. 특히 란트바써 비아둑트는 해발 1048m 지점의 협곡 사이 암반에 터널을 뚫고 돌다리를 이어 붙인 다리로 1902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놀랍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에 탑승한 사람들은 ‘기차여행’을 즐길 자세가 이미 되어 있다. 설렘을 한가득 품고, 기차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창가에 달라붙어 곧 펼쳐질 100% 내추럴 아이맥스 영화를 기다린다. 파노라마 디자인의 거대한 통유리창 역시 영화 감상에 한몫 거든다. 탁 트인 스크린은 시원 하게 내달리는 기차 속도에 맞춰 눈 덮인 산과 숲, 호수, 폭포 등을 펼쳐놓는다. 자동반 사적으로 동공을 확장시키는 아름다운 자연 탓(?)에 카메라 셔터는 쉴 틈이 없다.

 

스위스 소도시, 포스키아보 산책

이탈리아 티라노에서 스위스 쿠어까지 145km, 4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지만 이대로 가기엔 아쉬움이 크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가 연결하는 도시들은 취리히나 베른, 제네바와 같은 대도시에 비해 규모도 작고 여행정보도 턱없이 부족한 곳이 많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하룻밤 느긋하게 쉬어가길 추천한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여행의 기쁨을 선사하니 말이다.

이번에는 이름부터 낯선 도시 포스키아보에 머물기로 했다. 기차역에서 내렸을 땐 꽤나 모던한 도시처럼 보였지만 도심 안으로 들어갈수록 중세시대 모습을 드러낸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안개가 짙게 깔린 마을을한 바퀴 돌았다. 1848년 지어진 포스키아보 최초의 호텔 알브리치를 중심으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돌바닥을 따라 중세시대 건축물이 건재하다는 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표적인 건물은 산타 마리아 아순타 교회, 산타 비토레 교회, 산타 카를로 보로메오 교회 등으로 소박하지만 섬세한 멋을 보여준다.

포스키아보에서 한 정거장 거리인 르 프레 세역은 2~3분만 걸어도 포스키아보 호수와 연결된다. 고풍스러운 르 프레세 호텔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는 것도 좋았지만 이보다 더 특별했던 건 잔잔한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치즈와 와인 등 지역 특산품을 곁들여 즐긴 것. 바쁘게 관광명소를 쫓는 대신에 선택한 휴식의 시간이 맛과 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기차가 종착역을 향해 달린다. 여행도 끝을 향해 달린다. 아름다움에 익숙해져 이제 웬만한 풍경은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내눈은 아직 그렇지 않은가 보다.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몽글몽글 기억에 담는다.

 

  • Bernina Express ?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스위스의 쿠어(Chur), 다보스(Davos), 생모리츠(St. Moritz)에서 이탈리아의 티라노(Tirano)까지 양방향으로 운행하는 총 3개 노선이 있다. 총 25개 역이 있고, 55개의 터널과 196개의 다리와 구름다리를 지난다. 쿠어와 티라노 노선은 사계절 내내 운행 하지만 나머지 노선은 여름 시즌만 운행하고, 시즌 날짜가 매해 변경되니 미리 체크해야 한다. 베르니나 익스프레스는 퍼스트 클래스, 세컨드 클래스 등 총 4개 타입의 좌석이 있고, 스위스 트래블 패스나 유레일패스 소지자라도 미리 좌석을 예약해야 탑승할 수 있다. 성인 기준 여름 시즌 CHF14, 겨울 시즌 CHF10, 별도의 예약비가 발생한다. 여름철에는 스위스 루가노와 이탈리아 티라노를 연결하는 베르니나 익스프레스 버스를 운행하기 때문에 루가노 에서 코모 호수를 지나 티라노까지 버스 여행도 즐길 수 있다.

2018년 여름 시즌 5월 1일~10월 28일 겨울 시즌 10월 29일~12월8일

 

 

글·사진 김정원 취재협조 스위스관광청 www.myswitzerlan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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