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시선 ( 詩選 )

하루 중 시를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시인도
문학평론가도 아닌 출판사의 편집자가 아닐까?
시에도 트렌드가 있다면 바로 이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질문했다.
당신이 가장 애정하는, 이번 여름휴가에 함께하고 싶은 시집을 꼽아달라고.

 

[ 문학과지성사 최지인의 시선 ]

  • 김승일 < 에듀케이션 >

 

이래서 좋다 가끔 삶이 부조리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빼어나게 잘만들어져 오히려 어딘지 허술해 보이는, 썩 웃기지도 슬프지도 않은. 이건 회의 혹은 부정이라기보다 그저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가까울 것이다.

이럴 때 읽자 시험날 수학 문제지를 눈앞에 두고서, 백미터 달리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상황과 내가 겉돌 때가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종종 찾아오는 그런 순간마다 이 시집을 떠올린다.

막 태어난 것처럼 너는 울잖아./분노에 떨면서 겁에 질려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네가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이./이상하게 생각되는 날이면, 세상은 자주/이상하고 아름다운 사투리 같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데./ 그날 너는 우는 것을 선택하였지.

-‘나의 자랑’ 中

 

  • 김소연 < 수학자의 아침 >

이래서 좋다 늘 애틋한 마음을 길어내는 시집. 누군가를 혹은 어떤 순간을 그리워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럴 때 읽자 긴 밤, 잠이 오지 않아서 자꾸만 눈이 떠질 때. 스탠드를 켜놓고 이불 속에서 한문장씩 천천히 읽기.

우리가 만난 곳을 생각해 내가 기대어 한숨을 쉬었던

그 벽에서 너는 두 손을 모아 균열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

-‘실패의 장소’ 中

  • 임솔아 <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

이래서 좋다 마음 안의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 있는 상황에서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 진다.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는 아이가 걷는 법을 터득하듯, 한 박자 한 박자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럴 때 읽자 마음이 너무너무 복잡하다. 우주에 나하나만 남은 기분! 나…. 잘 견딜 수 있을까?

이곳을 떠나본 자들은/지구가 아름다운 별이라 말했다지만/

이곳에서만 살아본 나는/지옥이 여기라는 걸증명하고 싶다.

-‘아름다움’ 中

 

  • 장수진 < 사랑은 우르르 꿀꿀 >

이래서 좋다 고교 시절 잡지모델과 VJ로 활동하다가 2004년부터 연극을 시작해 극단 ‘골목길’ 단원이기도 했던 장수진이 시인으로서 내놓은 첫 번째 시집. 미학적 일탈보다는 인간의 여러 모습에 다가가고자 시도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장면으로 읽는 사람을 홀려낸다.

이럴 때 읽자 어둑한 퇴근길 맥주 한 잔이나 심야 영화 한 편이 그립다가도 내일 아침 눈꺼풀의 무게를 가늠 하며 마음을 돌리는 게 서글프게 느껴질 때.

술과 안주와 흘러간 가요 속에서, 돈 몇 푼 오가는 생을 깔보며/나는 말했지/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당신은 운 것 같아’ 中

  • 정한아 < 울프 노트 >

이래서 좋다 한때 ‘신세대’ ‘X세대’ 로 불렸고 지금은 ‘포스트386’이라 지칭되지만 어떤 것도 딱 들어 맞는 명명이라기엔 좀 어긋나고 어정쩡한 세대에 속한 시인 정한 아의 정체성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시집을 펼치면 가식 없이 소탈하게 보고 느낀 세계를 치고 들어가는 그녀의 호쾌함에 정신없이 빨려들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읽자 트림하고 방귀 뀌는 더러운 직장 상사, 어이없게 가르치려 드는 학교 선배들로 가득한 구질구질 인생의 틈바구니에도 어딘가 내게 멋지고 좋은 언니 하나쯤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싶을 때.

내 동생을 괴롭히는 자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시인의 말’ 中

[ 문학동네 김봉곤의 시선 ] 

  • 박상수 < 숙녀의 기분 >

이래서 좋다 이 시집을 들고 나서면 나도 설리의 기분? 세상에 아름다운 시는 많지만 이렇게 재미 있는 시가 있다고요? 이래도 된다 고요? 이래도 되고, 이래도 좋아요!

이럴 때 읽자 함께 쇼핑을 하기로 한 친구가 도무지 도착하질 않아요. 화도 나고 열도 나서 근처의 커피숍에 들어갔는데 너무 시원해서 오히려 친구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 얼음이 가득 채워진 스파클링 피치 소다와 이 시집이 함께한다면.

큐티 큐티 큐트 샤라랑!
-‘숙녀의 기분’ 中

 

  • 신철규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이래서 좋다 먼저 새파란 표지가 우리의 눈을 시원하게 해줄 것입 니다. 그러나 이내, 서늘하다 못해 마음을 차갑게 얼어붙게 할지도 몰라요. 투명하고, 아름답고, 슬프 고, 시린 시들이 책을 덮는 순간까지 파랑으로 몰아칩니다.

이럴 때읽자 바다를 보러 갔다 해가 뜨는 것까지 지켜보고 말았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다 마음은 뭉클해지는데 눈시울은 뜨거워지는데 나의 말을 대신할 길이 없고요. 문득 고개를 돌리고는 가방을 열었는데 눈앞의 바다를 닮은 이 시집이 보입니다.

여기는 투명한 그늘이고 저기는 여전히 물방울이 타오르고 있어.
-‘무지개가 뜨는 동안’ 中

 

  • 장이지 < 레몬옐로 >

이래서 좋다 파란 하늘, 그곳에 쨍하게 뜬 해를 닮은 표지에 먼저 기분이 밝아질 거예요. 초여름의 서정과 유년의 노스탤지어를 담아낸 아름다운 시편들이 가득합니다. 어린 시절처럼 맑아집니다.

이럴때 읽자 어쩐지 오늘은 전자 모기 향이 아닌 어린 시절의 초록 모기 향을 태우고 싶을 때. 에어컨을 끄고 창을 열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시원할 때.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데….

여기는 소녀가 없는 유월, 플루트의 은하가 이르는 곳…
-‘시칠리아노-유월’ 中

  • 최문자 < 파의 목소리 >

이래서 좋다 파도 좋아하고 파꽃도 좋아합니다. 파꽃처럼 아름답 고, 파처럼 맵고 알싸한, 오래도록 입안에 맴도는 시편들이 줄을 이어요. 여름에 가장 무성한 초록들이 진하게 가득 담긴 시집.

이럴 때읽자 한여름 폭우가 내 눈물 같을 때, 폭우가 아니라 장마가 되었을 때, 눅눅한 기운이 싫어 보일러를 켜 군불을 때다 문득 진짜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하얗게 말라가는 이불과 함께이 시집을 뒤집어씁시다.

사랑이 끝나자 여름이 왔다 그해 여름의 절반은 물이었다
-‘그 여름’ 中

 

  • 서대경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

이래서 좋다 길고 긴 열대야를 닮은 산문시. 하지만 밤을 닮아 조금은 시원해지고 어느 순간 우리가탄 열차는 겨울로 가고 있습니다. 과거로, 이국으로, 밤으로, 당신으로 향하는 이 시집은 여름밤에 가장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을 닮았 고요.

이럴 때 읽자 돌연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는 혼자 기차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기차가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완전히 해가 져 바깥은 까맣기만 합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고, 보이는 건 창밖의 드문드문 불빛과 차창에 비친 내 얼굴. 나는 이 시집을 펼쳐 이국보다 더 먼 곳으로 갑니다.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들고 나는 당신의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듣지
-‘낮달’ 中

 

[ 창비 박준의 시선 ]

 

  • 김용택 < 울고 들어온 너에게 >

이래서 좋다 김용택 시인의 시는 섬진강처럼 끊임없이 흘러왔다. 때로는 거세게 굽이쳤고 어느 순간 에는 소(沼)처럼 스스로의 문학을 전복하고 갱신했다. 그리고 지금은 고운 모래밭을 지나는 유순한 강처럼 넉넉한 세계를 내어 보이고 있다. 아름답고 아름답다.

이럴 때 읽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과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반반일 때.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쉬는 날’

 

  • 안희연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

이래서 좋다 안희연 시인은 세련된 감각적 이미지와 발랄한 상상 력을 서정이라는 유장한 물줄기에 태워 멀리멀리 흘려보낸다. 소멸해가는 세계와 존재의 실상을 섬세한 관찰력으로 투시하면서 삶과 현실의 고통을 매혹적으로 노래한다.

이럴 때 읽자 누군가가내 이마를 짚어주었으면 싶을 때.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물속 수도원’ 中

 

  • 안미옥 < 온 >

이래서 좋다 시란 근본적으로 노래하듯 말하는 것이고 논리나 의미 이전에 먼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이라는 소박한 사실을 안미옥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된다. 눈보다 마음으로 읽게 되는 다정한 시편들.

이럴 때 읽자 마음이 추울 때, 그래서 독한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무릎이 깨지더라도 다시 넘어지는 무릎/ 진짜 마음을 갖게 될 때까지
-‘한 사람이 있는 정오’ 中

 

  • 이시영 < 하동 >

이래서 좋다 이시영 시인의 짧은 시들에는 여느 장편소설보다 더길고 기구한 ‘서사’가 있다. 시인은 우리의 삶에서 소박하지만 생명력 강한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그것을 시로 만드는 데 능통하다. 아울러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온몸으로 지나온 시인의 경험들이 슬프면서도 즐겁게 녹아들어 있다.

이럴 때 읽자 지리산 골짜기의 산바람 같은 서늘한 이야기들이 그리울 때.

 

오늘 하늘이 저처럼 깊은 것은내 영혼도 한때는 저렇듯 푸르고 깊었다는 것.
-‘하늘을 보다’

 

  • 임경섭 < 우리는 살지도 죽지도 않는다 >

이래서 좋다 임경섭 시인의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이국의 인명들은 낯설다. 게다가 시적 공간도 대개 너무나 먼 이방(異邦)이다. 그런데 이 낯선 것들이 반복되면 될수록 존재와 풍경들이 오히려 또렷 해진다. 먼 사실들은 간혹 이렇게 진실을 가까이 데려오기도 한다.

이럴 때 읽자 지금 이곳의 나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을 때.

태어나기도 전의 일을 아빠는 어떻게 아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지금 너에게처럼 나도 할아버지가 알려주었다고/나는 대답했다/ 그럼 아빠는 할아버지의 말을 모두 믿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바이세엘스터강’ 中

 

 

 

이현화 협조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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