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되 가볍지 않게 “윤형근”

스밈, 번짐, 절제. 한국 단색화를 이끈 화가 윤형근을 표현하는 단어는 꽤나 부드럽고 정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함 속에 강인함을 녹인 오랜 자아성찰의 결정체다.

 

흙냄새, 나무 냄새 진하게 올라오는 굵은 선이 마치 큰 뜻을 품은 획(劃)처럼 마포 위를 지난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반복되는 덧칠, 선과 선이 겹쳐지며 화폭은 점점 깊고 오묘한 먹빛으로 자리 잡는다. 무엇을 표현한 걸까. 보기에 따라 그것은 거대한 기둥으로도 보이고, 위태로운 절벽으로도 보이고,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나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동굴로도 보인다. 검게 그을린 듯한 암갈색과 푸른빛이 도는 군청색을 섞어 만든 독창적인 색감.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거장 윤형근은 그만의 시그니처 컬러로 ‘엄버-블루’, ‘번트 엄버-울트라마린’을 내세우고 ‘청다색(靑茶色)’이라 이름 붙여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처음부터 청다색을 즐겨 사용했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 그의 드로잉북을 살펴보면 오히려 노랗고 파랗고 빨간 원색들로 가득하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작품을 발표할 여력은 되지 않았으나 습작을 통해 묵묵히 화가의 길을 걷던 그에게 영향을 준 이는 스승이자 동료, 심지어 장인이기도 한 추상화가 김환기였다.

▲윤형근 작가의 드로잉북, 1966

특히 1970년에 발표된 김환기의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윤형근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표현 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전통 한지에서 느껴지는 스밈과 번짐 효과를 극대화해 절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화려하던 원색의 향연은 교사로서 불의를 참지 못해 부정입학 비리를 폭로했다가 고초를 겪은 이후 어둡고 무거워졌다. 이 분한 마음, 억울한 마음을 어이할꼬.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격정의 감정을 짙은 색으로 덮고 또 덮으며 다잡았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청다색’이라는 윤형근 고유의 컬러를 남긴다. 그의 작품은 가볍지 않다. 작품 하나하나에 올곧게 살고 싶은 작가의 고뇌가 담겼다. 무심하게 그리는 선, 차분하게 누르는 색, 아지랑이처럼 번지는 마음.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윤형근은 치유와 희열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청다색은 더 짙고 오묘하게 다가온다.

 

 

윤형근展

국립현대미술관이 윤형근 작가의 작품과 정신세계를 회고하는 <윤형근展>을 연다. 전시는 크게 윤형근 작가의 초기 작품과 드로잉을 볼 수 있는 첫 번째 섹션과 1973년부터 1990년대 대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두 번째 섹션, 그리고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마지막 섹션으로 나뉘며, 사후 미공개로 남아 있던 작품을 비롯해 총 60여 점의 작품과 50여 점의 자료를 선보인다.

│2018년 8월 4일~12월 16일(월요일 휴관)│서울관 통합권 4000원│서울 종로구 삼청로 30│02-3701-9500│

 

▲ 드로잉 Oil on Paper, 35.5×25cm, 1970

▲ 드로잉 Oil on Paper, 35.5×25.5cm, 1970

▲ 청다색 Umber-Blue Oil on Linen, 270×141cm, 1978

▲ 청다색 Burnt Umber & Ultramarine Oil on Linen, 33.5×45.5cm, 1998

▲ 청다색 Burnt Umber & Ultramarine Oil on Linen, 25×65cm,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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