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여행을 허하라

아주 오랫동안, 여행은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남편 혹은 아버지와 동행하지 않고는 집 밖을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감하게 세상을 여행하고야 만 여성들이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김만덕

딱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빌어야 할까. 제주 거상 김만덕의 소원은 ‘바다 건너 금강산 유람’이었다. 1794년 ‘갑인년 흉년’ 때 뭍에서 쌀 500섬을 사서 제주 백성 1000명을 살린 그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유명하다. 그러나 김만덕이 나랏님의 상도 사양하며 “서울 가서 임금님 계신 곳을 바라보고 금강산에 가서 일만이천봉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만덕전’, <번암집> 55 권)고 청한 일화는 모르는 이가 많다. 당시 제주 여자는 법에 의해 바다 건너 육지로 나올 수 없었고, 여성이 산천을 유람하면 ‘바람난 여자’로 몰려 장 100대에 처해졌다. 상황이 이러니 자수성가했을지언정 ‘제주 여자’라는 멍에에 묶여 있던 김만덕의 소원이 ‘여행’이었을 법도 하다. 김만덕은 ‘의녀반수’의 관직을 받고 기생 출신 양인으로는 최초로 정조 임금을 알현했고, 꿈에 바라던 금강산 유람을 마쳤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고 11년 뒤, 출륙금지령이 폐지됐다.

 

여성 최초로 세계일주, 잔바레

여성은 탐험대에 끼지도 못하던 시절, 잔 바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바다를 여행하고 싶었다.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스물한 살, 그녀는 가정부로 취직하게 된다. 프랑스 국왕의 박물학자인 코메르송 박사의 집이었다. 1년 뒤, 그녀의 총명함을 눈치 챈 코메르송은 잔 바레를 가정부가 아닌 조수로 삼고, 식물 정리를 위해 라틴어와 식물 표본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1766년, 코메르송이 국왕의 명령으로 프랑스 최초의 세계 탐험대에 포함되자 잔은 남장을 하고 몰래 프랑스 해군 함대에 몸을 싣는다. 물론 그녀의 남장은 곧 들키고 말았지만, 갖은 위협 속에서도 흉막염에 걸린 코메르송 대신 식물연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1774년, 프랑스에 돌아와 브라질, 우루과이, 파타고니아, 타히티, 모리셔스 등 세계를 일주한 첫 번째 여성이 됐다. 그녀가 기증한 식물 씨앗과 곤충 표본 등은 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이 보관 중이다. 여자는 배에 탈 수 없다는 말에 “그럼 내가 최초가 되겠다”라고 당당히 응수한 잔바레, 그녀의 뒤를 수많은 여성탐험가가 잇고 있다.

 

남장하고 팔도유람 김금원

여행 한번 하는 데 임금님 허락까지 필요한 국법 따위 맘껏 비웃은 열네 살 소녀가 있었다. 경인년(1830년) 춘삼월에 머리를 동자처럼 땋고 전국 팔도를 유람한 몰락 양반의 서녀, 김금원이다.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을 깨칠 정도로 영특했던 그녀는 단양의 선암계곡, 영춘의 천연굴, 청풍의 옥순봉을 찾아 감동을 시로 읊었다.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한눈에 품고, 장안사와 명경대, 보덕굴, 표훈사 등 금강산의 내산과 외산을 살뜰히 둘러봤다. 관동팔경을 보고자 통천으로 향해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경포대 등을 거치며 꼼꼼히 기록했다. 호서와 관동을 돌아보고 서울까지 여행한 김금원은 마침내 원주로 돌아왔고, 14세부터 34세까지의 궤적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로 남겼다. 여성이 가족적 유대나 가문 의식의 확인에서 벗어나 오로지 여행을 목적으로 쓴 최초의 여행기다. “눈으로 산하의 큼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사물의 무수함을 겪지 못한다면 그 변화의 이치를 통달할수 없어 국량이 협소하고 식견이 좁을 것”이라 한 김금원은 여자가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탓에 총명함을 타고나도 공자와 맹자가 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녀에게 여행은 곧 자아의 확장이었다.

 

세계가 내 무대다 최승희

1930년대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세계여행 기행문이 더러 실렸다. 그중 원조 한류스타인 무용가 최승희의 글도 있다.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 사사해 춤으로 조선과 일본을 사로 잡은 그녀는 1937년부터 3년간 미국과 남미, 유럽을 순회하는 ‘월드 투어’를 한다. 누구나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의사 월급이 100원이었고, 요코하마-샌프란시스코 여객선 3등석이 110원이었으니까. 최승희는 자신의 재능으로 세계를 누빌 기회를 잡았고, 동양의 ‘리듬’을 몸에 지닌 채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뒤에는 결코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무용예술이 어떠한 것이라는 것과 예술가의 양심이라는 것을 깨달아”갔고, “폭탄과도 같은 위대한 정열을 거꾸러질 때까지 보여 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조국은 한낱 식민지였고, 일제에 배일 의혹을 받았고, 동포들에겐 친일 의혹을 받았으니까.
끝내 남편과 월북한 뒤 숙청당했지만 최승희는 나라는 망해도 민족은, 그민족의 예술은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전무후무한 예술가였다.

 

정열의 방랑자 프레야 스타크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여행의 달인, 방랑의 여왕, 대담하고 전설적인 여행의 시인,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여행가…. 모두 오지탐험가 프레야 스타크를 가리키는 말이다. 생일에 <천일야화>를 선물받은 아홉 살 소녀는 영어와 이탈리어, 독일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런던대학 베드퍼드 칼리지에서 공부한 2년과 1927년 런던 동 방학원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수학한 것이 그녀가 받은 정규교육의 전부. 이토록 열심히 언어를 공부한 까닭은 낯선 여행지와 혼연일체가 되기 위함이었다. “여행지의 일부가 돼야 의미 있는 걸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그녀, “낯선 마을에서 아침에 홀로 깨어날 때”가 가장 즐겁다던 그녀, 서른넷 늦은 나이에 여행을 떠났지만 아흔 살까지 여행을 멈추지 않았던 그녀…. 베이루트, 시리아, 레바논, 페르시아, 예멘등 서구인으로서 남부 아라비아의 오지를 처음 여행하고 30여 권이 넘는 책을 남긴 정열의 방랑자, 프레야 스타크. 그녀의 인생이야말로 <천일야화>, 그 자체였다.

 

 

 

이현화 참고도서 <경성 엘리트의 만국 유람기>, <당찬 여자들, 세계의 끝으로 가다>, <정열의 방랑자-프레야 스타크>,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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