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주가들의 알코올 예찬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을 때 마시는 술은 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밤보다는 몸이 팔팔하기 때문이겠지.
몸도 마음도 원하는, 말하자면 승리의 나발을 부는 술이다. 사람들이 한창 일하는 시간에 마시니 어쩐지 겸연쩍기도 한데, 그런 느낌이 술을 더맛있게 한다.
아직 할 일이 남았건만 그걸 무시하고 밝은 햇살 아래서 당당히 마셔버리는,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냐는 식의 통쾌한 기분도 술맛을 돋운다. 마셔도 아직 ‘오늘’이 남아 있다는 시간적 여유로움도 술맛을 풍성하게 한다. 말그대로 밝은 술이다. 마시고 싶으니까 마신다. 그러니 취기도 명쾌하다. 기분 좋다. 한낮의 술은 어디를 어떻게 뜯어보아도 최고다. 그리고 술에 넘어가기 전에, 술에 무릎을 꿇기 전에 거침없이 돌아가는 것이 이상적이긴 한데. 쩝.
– 구스미 마사유키, <낮의 목욕탕과 술>, 지식여행

뻑뻐억한 막걸리를 큼직한 사발에다가 넘실넘실하게 그득 부은 놈을 처억 들이대고는 벌컥 벌컥 벌컥 한입에 주욱 다 마신다. 그러고는 진흙 묻은 손바닥으로 입을 쓰윽 씻고 나서 풋마늘대를 보리고추장에 꾹 찍어 입가심을 한다. 등에 착 달라붙은 배가 불끈 솟고 기운도 솟는다.
– 채만식, ‘불가음주 단연불가(不可飮酒 斷然不可)’

공중파 방송국의 아침 프로그램에서 해외 관련 코너를 연출하고 있을 당시, 전통적인 삶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루마니아 북부로 향했다. 마라무레슈(Maramureş)의 한 증류소에서 빨링꺼(Palinkă)와 처음 만났다. 알코올 도수는 무려 60~80도. 첫 모금에 마셔본 세상의 모든 술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강렬한 체험을 한 뒤, 주저 없이 1.5리터들이 페트병에 빨링꺼를 가득 채워 절연테이프로 마개를 단단히 봉해 한국으로 부치는 짐 속에 넣었다. 하지만 그 1.5리터를 다 마시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다음 날부터 시작된 후회와 목마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사를 부려 이별당한 남자의 상사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뒤 루마니아를 다시 찾을 기회를 얻기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빨링꺼는 제철 과일을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드는데, 계절별로 사과, 배, 자두 등이 쓰인다. 두세 달 발효시킨 과일을 건더기째 단식증류기에 채우고 두 시간 동안 끓이면 묽은 우유처럼 뿌연 술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쭈이꺼(Ţuică)다. 아침에 마시기 적당한(?) 30~50도의 알코올 도수다. 하지만 로마제국을 끝까지 괴롭혔던 화끈한 다치아(Dacia)족의 후예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쭈이꺼를 따로 모아 다른 증류기에서 한 번 더 끓이면 그제야 비로소 빨링꺼가 만들어진다.
증류소 주인 할머니가 빨링꺼를 조금 받아서 가열된 증류기에 뿌려본다. 화아악! 파란 불꽃이 마법처럼 피어오른다. 그 어떤 계측기도 흉내 낼 수 없는, 완성된 술의 등장을 알리는 퍼포먼스다. “됐어. 제대로 된 거야.”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 가득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권한다. 느릿느릿, 손에서 코로, 다시 입으로, 그리고 번개처럼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희미한 귀울음만 들려올 뿐. 빨링꺼를 접한 첫 느낌은 ‘한 대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식도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송두리째 둘둘 말아버리는것 같은 고통. 비록 찰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삽시간에 그 괴로움을 지우며 올라오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강렬하고 발랄한 과일 향기. 0.5초 안에 극한의 자학과 보상을 오간 이 순간의 체험을 표현하기엔 아직 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5리터만 구입하고 싶습니다.” 식도의 울림이 잦아든 뒤 간신히 내뱉은 문장이었다. 첫사랑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가슴속에, 머릿속에 남아 어쩔 수 없이 다음 연애 상대를 규정하고 비교하는 대상이 된다. 눈가에 핑도는 눈물과 함께, 나는 나의 첫사랑과 다시 만났다.
– 탁재형, <스피릿 로드>, 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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