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감성으로 소녀를 그리다, 박항률

박항률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소녀, 옆모습, 침묵, 그리고 기다림. 명상화가로 불리며 25년 넘게 소녀와 소년의 옆모습을 그려온 그의 작품에는 왠지 모를 따뜻함과 아련함이 서린다. 어디를 바라보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말없는 소녀의 시선이 바라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박항률이 처음부터 이런 화풍을 고집한 건 아니었다. 한때는 설치와 오브제 미술에 열중했고, 한때는 기하학적인 추상화에 심취해 있었다. 인생이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듯 그에게도 예기치 않은 변화가 찾아왔다. 가르치던 제자의 권유로 평소 끄적거리던 글을 모아 <비공간의 삶>이라는 시집을 발행하면서부터다. 명색이 화가인데 출판기념전을 한번 열어보자는 생각에 서울 인사동의 조그만 화랑을 빌렸고, 시집에 어울리는 까까머리 소년 그림을 몇 점 그려 전시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반응이 좋았다. 작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형상미술로의 전환은 모험이었지만 또 다른 시작이었다. 소년을 주제로 한 작품은 어느새 소녀로 이어졌고, 꽃과 새, 나비, 상상의 동물 등 자연의 소재를 그려 넣으며 그만의 색을 입혔다. 여기에 오랜 기간 추상화를 그리며 다진 표현 기법을 녹여내니 작품은 오롯이 박항률만의 것이 되었다. 오늘도 그는 기억 저편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과 어머니, 누이, 동무의 흐릿한 이미지를 떠올려 그림을 그린다.
그가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비우는 것처럼,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1974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 으며, 세종대학교 예체능대학 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1977년부터 꾸준하게 서울과 부산,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1991년 <비공간의 삶> 을 시작으로 <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 <오후의 명상>, <그림의 그림자> 등의 시집을 출간했다.

 

서울 평창동, 갤러리 골목에 위치한 박항률의 작업실. ‘새똥카페’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붙인 작업실에는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모은 아기자기한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다. 복잡한 듯 질서 있게 정리된 공간. 작가는 이곳에 앉아 사색을 즐기고 그림을 그리며 소박한 하루를 보낸다.
무제 93×67cm, Acrylic On Paper, 1994
저 쪽 27×47.5cm, Mixed Media On Wood, 1996
기다림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04
새벽 80X116.5cm, Acrylic On Canvas, 2010

 

 

김정원 사진 손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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