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수(繡)

자수(刺繡)의 ‘수’에는 ‘오색을 갖추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청·황·적·백·흑 고운 색실 따라 꽃이 되었다가 더러는 무시무시한 호랑이, 상상 속의 용이 되기도 하는 자수. 과거 그림이 남자에게 허락된 세계였다면, 자수는 여인의 내면을 표현 하는 규방공예의 정점이었다. 수틀을 캔버스 삼아 붓과 물감 대신 바늘과 실로 온갖 희로애락을 담아냈다.
우리 자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성행했다. <삼국지> 위지동 이전에 “부여인은 외국에 나갈 때 증(繒)·수(繡)·금(錦)으로 지은 옷을 즐겨 입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밖에도 신라 진덕여왕이 손수 짠 비단에 시를 수놓아 당나라에 보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백제 왕이 진모진(眞毛津)이란 자수 장인을 보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자수 유물은 조선시대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는 궁궐 안에 ‘수방’이 따로 있었어요. 꼭 여자만 자수 장인이 되란 법은 없었지요. 평안남도 안주에는 남자들이 제작하는 ‘안주수’ 1) 가 유명한데, 병자호란 이후에이 안주수 장인이 궁궐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거든.”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 최유현 선생은 우리 자수의 매력이 ‘해학’에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자수는 손이 아니라 가슴으로 놓습니다. 중국 자수나 일본 자수는 색이 화려하고 사실적이지만, 한국 자수는 색이 은은하고 생략과 과장이 들어가 예술성이 뛰어나지요. 또 꼰사 2) 를 써서 훨씬 입체적이고 역동적이기도 하고요. 60여 가지의 다양한 자수법을 어디에 어떻게 접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것도 우리 자수의 재미입니다.”

 

30대, ‘우리 자수’를 되찾다
최유현 자수장은 열두 살 때 아버지의 바지저고리를 지을 정도로 손재주가 빼어났다. ‘마음씨, 솜씨, 맵씨’를 강조하던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이 그 바탕이었다. 수예시간이 유난히 즐거웠던 여중생은 6·25전쟁 때 목포로 피란 온 자수의 대가 권수산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자수인의 길을 걷게 된다.
“목포가정여숙을 1등으로 졸업하고 스승님 문하에 있다가, 그분이 동아대학교 가정학과 학과장으로 초빙되면서 같이 부산으로 건너갔지요. 스승님은 일본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신여성이었어요. 대학을 다니며 계속 수를 놨는데, 스승님과 저의 생각이 조금씩 갈리더군요. 스승님은 자수도 서구나 일본의 선진 문물을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저는 맥이 끊긴 우리 자수를 되찾는 것에 더 관심이 갔어요.” 3)
우리 자수는 크게 나눠 옷에 놓는 복식자수, 생활용품에 놓는 생활자수, 예술 및 감상을 위한 예술자수, 불교의식에 사용하는 종교자수 등 네 가지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혼수에 직접 수를 놓았기에 자수의 인기가 상당했지만, 일제강점기 이후로 밑그림, 색상, 기법 등에서 왜색이 짙게 풍기는 국적 불명의 자수가 주를 이뤘다. 사회적으로 우리 문화 경시 풍조가 만연했던 탓이다. 그런데 최유현 자수장이 기존 생활자수에서 도자기와 민화, 산수화 등을 소재로 삼기 시작했으니, 일대에 얼마나 큰 파란이 일었겠는가. “내 자수 밑그림이 복사돼서 돌아다닐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웃 음). 자수에서 의외로 중요한 것이 창의력이거든. 남들이 하는 것만 계속하면 지겨워서 못 버텨요.”

40대, ‘심선신침’의 경지에 오르다
1987년, 최유현 자수장은 ‘효제도팔곡병풍’ 4) 으로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세로 128cm, 가로 408cm의 8첩 병풍으로, 소박한 민화를 매우 섬세한 자수 기법으로 화려하게 재해석했다. “전통문화에 계속 관심을 갖다 보니 그 뿌리가 불교문화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부턴 전국 사찰을 돌며 탱화에서 자수의 소재를 찾았지요.”
국내 유일의 만다라를 경북 예천 용문사에서 발견했을 때 선생은 ‘이거구나’ 싶었다. 수많은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이 모여 작품이 되듯 심선신침(心線神針), 수행하는 마음으로 8년간 혼신을 다해 수를 놓았다. 그렇게 탄생한 ‘자수만다라’ 5) 는 198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불교와 무관한 사람도 압도되는 ‘장엄미’는 이후 최유현 자수장의 작품마다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됐다. 그리고 무려 12년 동안 공들여 수놓은 작품 ‘삼세불도(三世佛圖)’를 지난 2016년에 완성하면서 선생의 고차원적 정신세계가 정점을 찍었다는 평을 받았다.
실 꼬는 법만 1년을 배우고, 제대로 된 소품 하나 만들기까지 7년이 걸린다는 전통 자수의 길. 제자들에게 ‘기능을 갖추기 전에 인성을 갖추라’고 늘 이야기하는 장인은 ‘마음씨, 솜씨, 맵씨’를 강조하던 장인의 어머니를 똑 닮았다. 그리고 평생을 바쳐 만든 100여 점의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않은 장인의 절개는 공방인 ‘중수원’ 6) 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언젠가 숙원인 자수박물관이 건립되면 미련 없이 기증할 계획이다.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 자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느긋한 사람은 작업 속도가 느려서 자수를 못해. 차라리 성질 급한 사람에게 인내를 가르쳐서 자수 시키는 게 나아요(웃음).” 수놓을 시간이 모자라 밥도 빨리 먹고 걸음도 빨리 걸어왔다는 최유현 자수장. “아마 지금도 자네(기자) 보다 빨리 걸을 것”이라며 웃음 짓는 선생에게서 열다섯 소녀가 언뜻 스친다.

 

 

1) 안주수(安州繡) 평안남도 안주에서 생산된 자수로 중국에 수출할 만큼 상품성이 뛰어났으며, 숙련된 남성 기능공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안주는 일찍이 누에치기가 발달해 조선시대 최고·최다 명주실 생산지였다.
2)꼰사 실 한 가닥을 반으로 나눠 각각 꼰 다음 다시 이를 풀리지 않게 반대로 꼰 실을 말한다. 꼬지 않은 실(푼사)에 비해 굵기도 다양하고 빛을 반사해 입체감이 잘 살아난다.
3)권수산 선생에게 동·서양 자수와 뜨개질, 누비, 조화 등 전 과정을 섭렵한 최유현 자수장은 교사로 10여 년을 재직하다 1963년 ‘최유현 수예학원’을 설립했다.
4) 효제도팔곡병풍(孝悌圖八曲屛風) 유교의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와 선비의 방을 상징하는 ‘책거리’를 한 폭에 조화시켜 조선시대 정신문화를 표출했다. 자연염료로 직접 염색한 수실에 전통 자수기법과 최유현 자수장이 독창적으로 개발한 자수기법을 함께 사용했다.
5) 자수 만다라(刺繡曼陀羅) 270×300cm의 대작으로 경북 예천 용문사의 만다라를 밑그림으로 하여 자연염료를 사용, 전통 자수기법을 복원했다. 2년여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작품.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은 경북 예천 용문사의 ‘만다라’를 밑그림으로 하여 치자·잇꽃·쪽 등의 천연염료를 사용했다. 만다라는 ‘본질을 지닌다’는 뜻의 범어로 수레바퀴처럼 ‘모든 살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뜻도 지니고 있다.
6)중수원(中繡院) 부산대학교 한국전통복식연구소 부설 공방. ‘수를 놓음에 있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말라’는 중용의 마음으로 이름 지었다.

 

 

이현화 사진 서헌강

 

 


 

 

 

SRT매거진 페이스북으로 이동

SRT매거진 인스타그램으로 이동

SHAR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