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이슈 : 소유] 소유하라,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소유냐 존재냐, 그것이 문제로다

미국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27세 때 진지한 실험에 나섰다. ‘얼마나 적게 가지고서도 행복할 수 있는가?’ 장소는 매사추세츠주 월든 호숫가의 오두막, 기간은 1845년 7월 4일부터 1847년 9월 6일까지였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과 도구만으로 최대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했다.
2년여에 걸친 기록이 오늘날 고전 명저로 손꼽히는 <월든> 이다.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죽음을 맞이할 때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오늘날 주목받는 슬로·미니멀·심플 라이프, 즉 삶의 속도를 늦추고 최소한의 것으로 단순하게 사는 라이프스타일의 원조 격이다.
가급적 적게 소유하려는 흐름이 일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소유한 물건들이 오히려 나를 소유하는 것 같은 느낌, 물건들이 나를 위해 있다기보다 내가 물건들을 위해 살고 있는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물건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소유하기 위해 또 일하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한다. 철학자 박이문이 ‘물건’이라는 글에서 말한다. “물건들이 대량화되고 많아질 때, 그것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속박하고 물건들의 고유한 가치 혹은 의미는 상실된다.”
소유는 근본적인 삶의 양식들 중 하나로 이해되기도 한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적 삶의 양식과 존재적 삶의 양식을 대비시킨다. 소유 양식에 젖은 학생은 강의 내용을 죄다 노트에 기록하여 외운다. 반면에 존재 양식으로 임하는 학생은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질문을 던지며 집중한다. 강의를 들은 후 그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가 소유에 대처하는 자세

그런데 모든 사람이 소유를 멀리하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사회는 활력을 잃고 쇠퇴해버릴 수도 있다. 조선의 실학자 박제가가 <북학의>에서 이 점을 설파한다. “사치가 날로 심해진다 걱정하는 사람들은 근본을 알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검소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물질을 소비하고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면 만드는 방법을 모르게 되고, 만드는 방법을 모르면 백성이 날로 궁핍해진다. 재화는 퍼내면 가득 차고 사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우물과 같다.”
오늘날 소유의 방식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소유 중심의 교환 가치에서 접속 중심의 공유 가치로 옮아가는 대전환이 진행 중이라고 주장한다. 수많은 센서가 모든 기기와 물건에 부착돼 사물과 인간을 연결하는 슈퍼 사물인터넷(IoT) 기술 덕분에 거의 모든 재화와 정보, 서비스 등을 제로 수준의 한계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에 따라 소유권보다 접근권이 더 중요한 공유경제구조가 된다는 것.
소유는 소유할 것인가 말 것인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청빈을 서약한 수도자의 삶이 아닌 한 우리 모두는 많든 적든 소유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유의 즐거움을 굳이 멀리할 까닭도 없으며 적절한 소유욕은 삶의 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관건은 소유하는 우리의 태도다. 소유하되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소유만을 위해 살지 않는 것. ‘소유하라, 소유하지 않은 것처럼.’ 무소유보다 훨씬 더 실천하기 어려운 태도가 바로 이러한 소유의 중용(中庸)이다. 아주 가끔 그런 중용의 달인들이 나타난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하는 자산 가나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처럼.

 

 

철학자 표정훈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번역과 저술, 출판평론을 해왔다.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 <탐서주의자의 책>, <철학을 켜다>, 번역서 <젠틀 매드니스> 등 10여 권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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