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이고 아름다운 매듭

겸손하여 더욱 아름다워라

 

‘매듭’하면 떠오르는 첫 기억은, 어린 시절 엄마가 취미로 만들던 장롱걸이다. 엄마의 손끝에서 끈이 갖가지 꽃처럼 피어나던 광경이 마냥 신기했던 기억.

그리고 지난 연휴, 가족과 함께 떠난 해외에서 우연히 매듭을 다시 마주쳤다. 골동품가게 문에 붙어 있던 우리나라 매듭 전시 포스터. 돌아오자마자 정봉섭 매듭장에게 연락을 드렸고, 늦겨울 감기로 고생하는 정 선생을 대신해 박선경 전수조교가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전수조교이자 정봉섭 매듭장의 장녀다. “옛날에는 남자 매듭장이 대부분이었대요. 가마나 상여, 국악기 등에 쓰이는 대형 유소(流蘇·끈목으로 다양한 매듭을 맺고 그 끝에 술을 장식하여 늘어뜨린 것)가 많아 팔힘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박선경 선생의 가업이 매듭이 된 것도 조부인 1대 매듭장, 故 정연수 선생이 시작이었다. 옛날 조부가 살던 광희문 일대에는 매듭장이 모여 살았는데, 친한 친구의 아버지 역시 매듭장이었다고 한다. 매듭 짜는 모양새가 재미있어 한 번 두 번 구경하던 것이 어느새 손재주 없는 친구 대신 조부의 생업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산업화가 되면서 매듭도 점점 수요가 줄었다. 마지막까지 버텼던 것은 정연수 옹 단 한 분뿐이었고, 그 끈기는 1968년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우리나라 1호 매듭장의 초석이 되었다.

매듭의 과정은 지난하고 복잡하다. 생사를 비눗물에 삶아 그늘에 말리고, 갖가지 천연 재료로 염색한 뒤 실을 풀고 합쳐 ‘다회치기’에 들어간다. 용도에 따라 4개, 8개, 12개의 실을 비비는 다회치기가 끝나면, 비로소 매듭을 맺고 술을 만든다. 30여 가지 전통매듭을 조합해 횃대(옷걸이)를 걸기도 하고, 방장(커튼)을 고정하거나 노리개를 만들기도 하고 옷의 여밈, 부채끈, 군인의 깃발, 악기 장식등 생활 전반에 다양하게 활용했다.

노리개 하나를 만드는 데 숙련된 솜씨로 꼬박 15일이 걸린다니, 자연스레 가족이 일손을 돕게 됐다. 처음에는 아들이 매듭하는 것을 반대했던 어머니가, 그리고 결혼 후엔 아내가 도왔다. 장녀인 정봉섭 선생에게도, 증손주 중 장녀인 박선경 선생에게도 매듭이 자연스레 흘러들었다. 그렇게 매듭장의 아내는 2대 매듭장이, 큰딸은 3대 매듭장이, 외손녀는 4대 매듭장이 되었다.

“살면서 ‘인연’이 소중하다고들 하잖아요. 매듭은 인연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로 되어 있어서, 중간에 잘못 엮으면 다 풀어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인간관계를 ‘끈’에 비유하고, 잘 마무리 짓는 것을 ‘매듭짓는다’고 표현하나봐요.”

몇 년 전, 우연히 TV에서 봤던 한 프랑스 할머니를 잊을수 없다. 그저 촌로(村老)인 줄 알았던 할머니는 본사 직원도 쩔쩔 매는 샤넬 공방의 장인이었다. 그것도 일평생 ‘장식끈’만 만들어온. 실을 한 올 한 올 밤새 엮어 섬세한 끈으로 만들어내는 할머니를 보자니 우리의 매듭이 떠올랐 다. 염사장, 다회장, 연사장, 합사장, 매듭장…. 이렇게 세분화되어 있던 체계가 다 사라져 21세기 매듭장은 모든 걸 혼자서 해내야 한다.

“샤넬, 루이비통 같은 럭셔리 브랜드도 처음에는 작은 공방에서 시작했어요. 그러다 차츰 조합이 생겨났고, 오늘날 ‘명품’이 되기까지 국가 차원에서 큰 역할이 있었죠. 우리는 계속해서 전쟁을 겪으며 많은 것을 잃었지만, 무형문화재 제도가 생겨나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잘 물려받았으니, 또 저만의 멋을 잘 담아서 후대에 물려주어야죠.” 장인(匠人)을 영어로 하면 ‘Artisan’이다. 단어 속에 이미 예술을 뜻하는 ‘art’가 들어 있다. 장인을 아티스트로 대접하는 점에서 드러나는 시각 차이, 이 차이가 가져온 결과는 결코 작지 않다.

 

박선경
1964년생,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 매듭장 전수조교 (1987~현재). 할아버지 故 정연수 선생(1대 매듭장), 할머니 故 최은순 선생(2대 매듭장), 어머니 정봉섭 선생(3대 매듭장)에 이어 4 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전통의 틀을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접목시킨 매듭’을 고민하는 젊은 장인이자 아티스트

 

➊ 나에게 매듭이란?

막다른 골목에서 할아버지가 늘어뜨린 실을 고무줄 삼아 놀던 아이가 있었다. 매듭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할아버지의 넉넉한 마음, 할머니의 단아한 손끝, 어머니의 올곧은 정신은 매듭을 통해 나에게 소중한 유산이 되었다.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매듭은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이다. 그 속에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➋ 장인이 생각하는 장인의 조건

근성. 솜씨도 중요하지만 엄청난 인내심을 요하기 때문에 ‘버티는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장인 선생님들을 가만히 보면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한다는 공통점이 있더라. 말 그대로 ‘장인정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어떤 일을 했더라도 그분야의 장인이 되어 있을 분들이시다.
 

➌ 영감의 원천

일하는 도중에 영감을 많이 받는다. 장인의 일이라는 것이 보통 주문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종종 생각지도 못한 디자인이나 발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손님이 있다. 얼마 전에도 전통공예품 컬렉터인 40대 남성 손님이 있었는데, 도록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패물 없이 매듭으로만 구성된 노리개를 주문했다. 매듭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서 보여주는데, 그 매듭끼리의 구성하며 미적 감각이 상당하더라. 덕분에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조합의 노리개가 탄생했다. 이렇게 일을 하며 협의해나가는 과정에서 많이 배우고, 새로운 멋을 느낄 때가 많다.
 

➍ 가장 비싸게 팔렸던 작품은?

약 1000만 원 안팎. 물론 개인 단위의 주문은 아니다. 보통은 예단과 관련된 주문이 많고, 노리개 하나당 평균 100만 원 정도 한다.
 

➎ 만약 장인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현대무용을 전공했으므로(웃음), 아마도 현대무용을 가르치고 있지 않을까? 동기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벌지 않았을까.(웃음)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고 욕망이 다양한 시대에 전통공예를 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아무튼, 무얼 했던 최선을 다했을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현화 사진 오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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