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눈동자, 시인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그리고 꿈과 희망은 오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中 –

 

‘향그러운 흙가슴’을 꿈꾸던 청년
부여에 가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천년고도의 유적들 외에 의외의 일깨움을 주는 유물과 맞닥뜨리게 된다. ‘삼월’, ‘발’, ‘우리가 본 하늘’, 그리고 ‘껍데기는 가라’의 시인 신동엽(1930~1969)의 생가다. 그는 김수영과 함께 1960년대의 대표적 참여시인으로 꼽힌다. 부여터미널에서 군청 방향으로 올라가다 군청에 거의 이를 무렵 오른쪽으로 꺾으면 신영복이 특유의 필체로 쓴 ‘신동엽 생가’라는 현판과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로 시작하는 시인 인병선(신동엽의 부인)의 헌시가 방문객을 맞아주는 파란 지붕의 낮은 토담집이 등장한다. 지금은 기와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시인이 살던 당시에는 초가집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렸던 방은 깨끗하게 도배되었고, 서가엔 시인이 보았음직한 책들이, 벽에는 산 위에서 찍은 시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십의 나이에 삶을 마감한 시인의 행적과 짧으나마 강렬하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의 출생지라기엔 너무도 초라한 시인의 생가 앞에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돈이나 명예, 사회적 지위, 육신의 편안함과 타협하지 않았던 고귀한 그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하늘을 머리에 이고 들녘을 품에 안은 이 초가집에서 나고 자랐다. 30세 되던 1959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면서 등단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시와 산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1961년부터 명성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하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벌였으며 1963년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등 18편을 수록한 시집 <아사녀>를 발간한다. 주말마다 산행을 즐기던 그는 1967년 ‘향그러운 흙가슴’을 바라며 ‘껍데기는 가라’를 발표하고, 그해 ‘펜클럽 작가 기금’ 5만 원을 받아 1968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한다. 장장 4800여 행에 달하는 서사시 ‘금강’은 그에게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부여했다. ‘금강’ 집필을 위해 방학 때면 호남을 여러 번 답사하고 설악산과 속리산 등을 찾아가 동학의 유적을 추적했다고 하니, 시작(詩作)을 향한 그의 열정이 얼마나 굉장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채움을 위해 영원한 비움의 여정 떠난 시인
시인을 넘어서 신동엽은 뛰어난 문화예술인이었다. 38~39세 무렵 1967년과 1968년에는 라디오 DJ를 맡아 밤늦도록 잠 못 이루는 영혼들을 달래는가 하면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해 또 다른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인생작 ‘금강’에 이은 ‘임진강’이라는 또 다른 장편서사시를 계획했던 그는 끝내 마무리하지 못하고, 1969년 서울 동선동 집에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작고한 지 24년이 지나서야 고향의 향그러운 흙가슴에 돌아온다. 그에 앞서 1989년에는 그의 시 ‘산에 언덕에’가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그렇게 ‘금서’는 교과서가 되었고, 젊음으로 작고한 시인은 또 다른 청춘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뒤 ‘신동엽 시비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를 기리는 문인, 동료, 제자 등 100여 명이 경비를 모아 1970년 4월 18일에 부여읍 나성 터 백마강 기슭 소나무 우거진 곳에 시비를 세운 것이다. 스스로 내린 결정이 아니건만 시비가 들어선 소나무 숲마저 공동체 속에서 무위자연의 평화를 꿈꾸는 한 생명이고자 했던 생전의 시인을 쏙 빼닮았다. 유족은 신동엽의 생가를 2003년 2월 19일 부여군에 기증해 죽어서도 시인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과 소통하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죽는 데 비해 어떤 이들은 전설 속으로 그냥 사라지기도 한다. 랭보가 그랬고 로르카가 그랬고 신동엽이 그랬다. 제주를 여행하면서 쓴 <1964년 여름의 제주 기행일기>에서 “짐을 버려두고 싶도록 어깨가 몹시 아프다”고 호소했던 그는 결국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안식에 들었다. 백발노인으로 늙어 회한 가득한 삶을 한탄하는 대신, 꿈을 꾸는 청년의 모습으로 작별을 고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1967년 어느 잠 못 드는 깊은 밤, 라디오에서는 DJ 신동엽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기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창밖에는 아직 바람이 불고 있군요.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세요.”
금강을 건너 부소산성 너머 불어온 바람에 나성 터의 마른 억새들이 흐느적거리듯 춤을 추며 자꾸만 사라락거리며 속삭인다. 좋은 언어로 채워진 좋은 세상을 꿈꾸었던 좋은 사람 신동엽이 우리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임지영   사진 홍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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