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전경린, 아라가야의 궤짝을 열면

AS TIME GOES BY | 작가의 고향을 찾아#5

아라가야 보물이 담긴 상자 같은 도시, 함안. 그곳에서 떨어지는 감꽃을 맞으며 자라난 소녀는 습지와 들판에서 소설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전경린 사진 임익순

내게 고향의 범위는 경남 함안의 진산인 남쪽 여항산에서 시작해 북쪽 끝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악양 습지까지다. 그 사이로 펼쳐진 긴 들판과 말이산 구릉 위에 솟은 40여 기에 이르는 고대국가의 봉분들과 남고북저의 땅 동쪽을 감고 물비늘을 반짝이며 역류하는 함안 천이 내가 떠올리는 함안의 원형적인 지형이다.

함안의 함은 모두 함(咸)이지만 나는 상자 함(函)을 상상한다. 고대국가로부터 내려온 보물이 담긴 궤짝의 이미지다. 그 궤짝에서 잊을 만하면 학계를 놀라게 하는 유물이 나와 전국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가장 최근엔 왕릉으로 추정되는 말이산 13호 고분에서 궁수 자리, 전갈자리 등 별자리 125개를 새긴 고대 천문도가 발굴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10년 전에는 고분발굴 현장에서 700년 된 연꽃 씨앗이 출토되어 이듬해 싹을 틔우더니 그 이듬해에 꽃을 피워 천년 환생의 신화를 재현했다. 고대의 꽃은 오늘 날의 연꽃과는 전혀 달랐다. 색은 퇴색한 듯 옅으면서 가장자리가 짙고 꽃잎은 더 갸름하고 줄기도 가늘어 멀고 초연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보니 고려 탱화에 그려진 연꽃과 놀랍도록 같은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엔 왕릉이 놀이터여서 주변에 널린 토기 조각들을 모아 집을 짓고 소꿉놀이를 했었다. 내가 태어난 마을 입구 감나무밭에서 고대의 거래 장부인 죽간이 출토되었고, 고려시대 연꽃 씨앗이 출토된 곳은 윗마을이었으며 내가 다닌 유치원 자리에서는 말 갑옷이 발견되었으니 고대국가의 품 안에서 자란 셈이다. 아버지는 군청 공보실 소속 공무원이었는데, 내가 12살 무렵엔 왕릉 공원과 박물관 청사진 한 부를 집에 가져와 구경시켜 주었다. 당시 마당 가엔 함안 일대에서 수집한 다채롭고 화려한 모양의 토기들이 쌓였다가 군청 창고로 옮겨지곤 했다.

함안박물관이 개관한 것은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나 흐른 뒤였다. 12살 아이가 42살이 된 시간, 하나의 꿈이, 상상이, 계획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 했다. 어린 시절 불꽃무늬 창에 눈을 대고 어둑한 안쪽을 들여다보곤 했던 토기들이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볼 때면 시간이 단숨에 회향하는 듯 급체하는 기분이 든다. 내 정신 세계에서는 시간은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시간은 하나의 생애 위로 켜켜이 쌓인다. 시작과 끝을 제 바깥에 둔 채 자신에게 자신을 더하며 고독한 나선형 무늬를 그리는 것이다.

여항산 아래 여항저수지의 물결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래서일까. 전경린은 어린 시절 이곳으로 흘러드는 함안천을 은하수라고 불렀다.

분지 너머의 먼 곳을 그리워하다
거대한 왕릉들을 구릉에 조성한 것은, 아래 땅이 습지 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야의 들판은 ‘방목’ 으로 불렸는데 짐승을 풀어놓고 먹인다는 뜻이다.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북쪽 끝은 여름마다 물이 밀고 올라와 들판에 홍수가 났다. 해발 700m가 넘는 여항산을 배를 타고 가는 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남고북 저의 지형을 풍수적으로 방비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큰 홍수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이런 지형 탓에 일찍 부터 제방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가야리 제방 유적 연대를 측정했더니 AD 190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득한 연대기를 가진 제방 공사는 일제 강점기와 근대를 지나 계속되어 현재 함안 둑은 338km로 전국에서 가장 길다.

제방 공사가 이어져 개간되면서 방목은 ‘한밭’으로 불렸다. 어린 내겐 오랫동안 한밭이 한바다로 들렸다. 그곳의 방언과 거센 억양과 ‘어’와 ‘으’가 구분되지 않는 발음, 그랬는교, 했슴니더, 그렇다카데예, 아입미더, 했는데예, 모름미더 같은 예스러운 어미와 말끝에 무조건 예를 붙여 존대하는 촌스러운 어미들은 글로 쓸 수없는 소리의 세계였다. 읽고 쓰는 교과서의 표준어와 화해할 수 없는 이중의 세계에서 나는 혼란을 겪었다.

알아듣지 못한 말도 많았고, 잘못 알아들은 말도 많았 다. 나는 그런 말을 쓰기를 거부했고 그런 말을 쓰는 사회 안으로 스며들기를 거부했다. 나와 고향 사이엔 언제나, 어디서나 불화의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아버지는 방목, 한밭으로 불리던 개활지 한가운데 자갈로 다진 택지가 조성되자 가장 먼저 집을 지었다. 그외딴집에는 오랫동안 이웃이 생기지 않았다. 탁 트인더 넓은 들판에서 마치 야영하듯 자연과 함께했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은 맹렬했고 몽환적이었다. 들판에 은비늘 같은 서리가 내린 12월 아침보다 투명한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서리에 덮인 들판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날카롭게 베인 벼 밑동을 뽀득뽀득 밟으며 학교에 갈 때면 눈물이 날 듯 동공이 시렸다. 들판이 흰눈에 덮일 때면 여항산과 왕릉과 은하수와 제방들이 지워지고 눈의 바다로 변했다. 한번은 눈 덮인 들판 끝까지 가기 위해 집을 나서기도 했다. 그 무렵 나의 일부는 늘 바깥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우묵한 분지 너머를 꿈꾸었고 알지 못하는 먼 곳을 그리워했다.

이른 봄에 흙이 부풀어 오르고 흙냄새와 아지랑이가 몸을 간질이면 겨우내 입은 내복을 벗어던지고 들판을 내달렸다. 봄바람이 고양이 털처럼 무릎을 간질이고 치맛자락이 종아리 위에서 찰랑대고 흙 기운이 발을 밀어 올렸다. 농수로 가에 물풀이 콩나물처럼 빽빽 하게 돋아오르고, 민물 비린내를 풍기는 물속엔 올챙이 떼와 피라미 떼가 헤엄치고, 집 곁 자갈밭 공터엔 미나리아재비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났다. 봄을 지나 누렇게 익은 보리와 밀을 베어낸 들판은 무논으로 변했 다가 죽은 사람도 일어나 일손을 보탠다는 모심기철을 지나면 벼 모종이 가지런히 꽂히고 논두렁 사이로 물이 철철 흘렀다. 흙빛 논물 위로 개구리밥이 푸르게 엉기고 논바닥엔 고둥과 미꾸라지가 살을 찌웠다. 미꾸 라지가 풍년이어서 우리 가족은 늦여름부터 가을 내내 물리도록 추어탕을 먹어야 했다. 미꾸라지를 체에 거른 맑은 추어탕은 함안의 명물 음식이기도 하다. 얼 갈이배추와 숙주, 고사리 같은 채소를 듬뿍 넣고 끓여 다진 풋고추와 홍고추와 마늘 외에도 함안 사람들이 많이 쓰는 제피 가루를 올리는데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맛이 깊고 맑고 힘차다.

나는 그 들판에서 가장 예민한 소녀기를 보냈다. 흐르는 물과 고인 웅덩이와 습지, 비와 안개와 아지랑이와 서리와 얼음과 눈이라는 물의 순환과 변신의 장이 나의 환경이었다. 들판의 진 땅은 하나의 형태로 굳어지지 않고 물 위에 뜬 듯한 몽환적인 정서와 감각을 길렀을 것이다. 내 소설에서 제한 없는 자유와 신선한 생명의 감각이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 것도 사회와 제도로부터 떨어져 야생의 땅에서 성장한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단에서의 내 별명은 소설 <염소를 모는 여자>에 빗대어 염소였지만, 젊은 시절을 함께 보낸 지인 들은 내 고향을 알고는 아라 공주라고 불렀다. 하지만 막상 나는 여자에겐 고향이 없다는 모진 말을 들으며 자랐다. 고향은 남자의 것이다. 딸은 떠나야 할 임시적 가족이었다. 그리고 한번 떠난 여자는 고향에 돌아와 서는 안 된다. 시대가 급변하는데도 관념은 고집스럽게 닫혀 있었다. 나는 몸가짐과 행동과 말과 역할 등 모든 것에서 남자가 아니고 여자인 것을 예민하게 의식하며 자라났다.

조선시대 문신인 조삼이 지은 정자, 무진정. 그의 호인 ‘무진’에서 이름을 따왔다. 전경린에게 고향의 숨겨진 배꼽 같은 존재다.

아름다움은 애증을 넘어선다
어릴 땐 애증이라는 말이 가장 알 수 없고 신비로운 말이었지만 이젠 자신을 포함한 삶의 모든 관계가, 아니 삶과 죽음의 관계조차 애증인 것을 안다. 고향도 마찬 가지다. 고향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생이 준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어서, 고향에 들어설 때면 나는 아직도 주춤거린다. 부대끼는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면 집보다 먼저 이수정 연못을 찾아간다. 지금은 바로 곁으로 새 도로가 나 정취가 많이 훼손되었다. 언뜻 보기엔 바위 언덕 위의 무진정도, 그 아래 이수정도 어느 고장에나 있을 법한 조선 초기의 정자와 연못일지 모르지만 내게는 고향의 숨겨진 배꼽 같은 곳이다.

아버지는 어느 연둣빛 봄날에, 서너 살 아이의 손을 잡고 걸음을 걸려 이수정에 데려갔었다. 낮은 둔덕에 올랐을 때 홀연하게 나타난 연못 앞에서 아이는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400여 년의 시간을 단번에 마주 치고는 버거웠는지, 혹은 처음으로 물에 비친 나무와 하늘을 보고 두 겹의 세상에 놀랐는지, 아니면 그릇과 세숫대야에 담긴 물만 보다가 처음으로 갇혀 있는 큰물을 보고는 아이답게 당황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왔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 받은 미적 타격은 지금까지도 내 몸에서 종소리 처럼 진동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소설가가 된 뒤 늙은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 이수정 불꽃 낙하 놀이를 본 일이 있었다. 연못 위와 가장자리에 거미줄을 짜듯 줄을 설치하고 마을 사람들이 만든 불꽃 심지를 촘촘하게 매달아 불을 붙였다. 숯가루로 속을 채우고 한지로 길게 만 낙하 심지는 느리게 타며 붉은 불티 를 시나브로 검은 물 위로 떨어뜨렸다. 물에 비친 불티도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면 두 겹의 불티들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해마다 하는 행사인데도 일생에 단 한 번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이다. 현실이 일정한 기준을 초과하면 영원과 꿈의 저편으로 넘어 가는 법이다. 그 밤이 그랬다. 처음 이수정을 보았을 때처럼. 아름다움은 애증을 넘어선다. 논리를 넘어서고 시간과 삶을 초월한다.

유유히 흐르는 남강 줄기를 따라나 있는 악양 제방길. 봄에는 양귀비와 안개초와 꽃잔디가,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양귀비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추억한다.

감꽃 떨어지던 시절
고향은 그 자리 그대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많이 변모했다. 남쪽 끝 여항산 골짜기는 펜션과 전원주택들이 자리 잡아 산악 휴양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보이고,
외딴집이 있던 들판엔 동네가 생겼으며, 북쪽 끝 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제방 아래엔 관광용 경비행장이 들어섰다. 함안천이 남강과 합류하는 벼랑 위 악양 루에 올라 내려다보면 변함없는 강산의 지형과 변해가는 사람의 문화가 한눈에 보인다. 개망초와 양귀비꽃이 섞여 피는 악양 제방 아래에 강변을 따라 활주로가나 있고 콜롬비아나 에콰도르 같은 곳에서 들어온 경비행기들이 계류해 있는 풍경을 처음 봤을 땐 이국적 이어서 당황스러웠다.

어머니가 계시니 1년에 서너 번 이상 고향에 가게 된다. 지금 어머니가 계신 곳은 내가 태어난 작은 마을이다. 부모님은 젊은 나이에 그 마을을 떠났다가 20여 년 뒤다시 들어가셨다. 따스한 햇볕에 데워진 보리와 밀 익 는 냄새가 나는 고향 중의 고향, 내 마음의 시원, 영혼이 부화한 자궁이다. 왕릉 사이로 난 좁다란 샛길로 들어가면 산기슭 양지바른 자리에 미친 여자가 사는 움막이 있었다. 볕이 좋은 날 여자는 움막 앞에 나와 앉아 겉옷을 벗어 말리며 졸았다. 길모퉁이를 돌면 바람에 물결치던 푸른 보리밭이 펼쳐지고 보리밭 사잇길로 다리를 저는 상이용사가 눈만 뜨면 놀려먹는 아이들을 잡으려고 달려온다. 문둥이가 아이를 잡아가 간을 빼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시절이었다.

특산물이 감인 고장답게 초여름이면 미색 감꽃이 떨어져 온 마을을 뒤덮었다. 어린 내게 감꽃은 하늘에서 내려준 신비로운 음식인 만나와 같았다. 감꽃이 내리는 철에는 이른 아침에 젖 냄새 나는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 이를 만들어 걸고 온종일 따먹으며 놀았다. 사철 내내 물이 흐르는 강변에 나가 송사리 같은 눈빛을 가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그땐 나와 세계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고, 내가 타인과 분리되지 않았고, 내가 나인 줄도 모른 채 자연의 품에서 무르익은 과육을 파먹으며 잘 노는 것이 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던 왕릉 안쪽의 작은 마을에도 트레킹 코스가 생길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타지에서 온산책객들은 구릉 뒤편에 숨어 있던 그 작은 마을에 들어선다 해도 미색 감꽃으로 덮인 순정한 풍경을 보지 못할 테니 안타깝다. 사라진 것들, 잊힌 것들은 모두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고향도 그렇다. 나선형 궤적을 그리는 시간의 가장 안쪽 자리에는 지금도 감꽃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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