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_5·18민주화운동 40주년 1980년에서 2020년까지

광주를 거닐며
“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을 엿볼수 있는 금남로. 옛 전남도청과 자유를 마주하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1가는 총탄이 빗발치고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40년 전 그날로 거슬러가보자. 1980년 5월 20일 오전, 광주 금남로에 투입된 수천 명의 공수부대가 약 2만 명의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진압을 시작했다. 오후에는 전일빌딩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공수부대에 항거하기 위해 광주 시민군이 등장했다. 다시 한 번 금남로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각종 차량을 이용한 시민군과 학생들, 여성까지 차량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며 시가지를 누볐다. 그리고 오후 12시, 군인들이 물러나지 않자 시민군이 공수부대를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이후 시위대가 관광버스 2대를 몰고 도청 앞 광장의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리며 버스 기사가 총에 맞았다. 마침내 비극이 시작됐다. 오후 1시 금남로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때 도청 옥상에서 시민군을 겨냥한 공수부대의 무차별 집단사격이 시작됐다, 참극의 신호탄.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졌고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도청 주변의 전일빌딩, 수협 전남지도부, 도청 별관 옥상에 배치된 공수부대가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방아쇠를 당겼다. 참혹했던 그날, 사망자 62명 가운데 총상 사망자는 53명이었다. 도청 주변에서 사망한 사람은 44명에 이른다. 같은 날 전남대 정문 앞에서도 임신부 최미애 씨를 비롯해 2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긴박한 상황에도 광주 시민은 정을 나누며 독재정권과 맞섰다. 부상자가 속출하는 주변 병원에선 “시민 여러분,피가 부족하니 헌혈을 부탁합니다!”라며 가두방송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의 수많은 이가 기꺼이 헌혈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눈물 나는 희생은 오늘날의 금남로를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

금남로에서 마주한 그날의 흔적


금남로를 찾은 기자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시민군이 계엄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항쟁했던 ‘옛 전남도청’과 헬기 사격을 증언하는 탄흔이 남아 있는 ‘전일빌딩245’가 보였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의 다양한 콘텐츠와 광주의 문화 발전을 도모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역사의 아픔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곳에서 5·18민주화운동의 흔적이 가장 가까이 담긴 전일빌딩245를 바라봤다. 외벽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탄흔의 위치가 보였다. 계엄군이 헬기에서 발사한 탄흔은 40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전일빌딩245의 본래 건물명은 ‘전일빌딩’이었지만 계엄군이 이곳에 발사한 245개의 총탄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변경됐다. 동시에 리모델링도 진행되어 옥상에 올라서면 탁 트인 금남로와 무등산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현존하는 5·18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목격자와의 만남을 뒤로한 채 금남로 시계탑으로 돌아왔다. 좌우로 옛 전남도청 자리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형제처럼 붙어 있어 신비로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과거와 미래의 만남. 현재 복원사업 중에 있는 옛 전남도청 자리는 존재자체만으로도 평온한 시민의 안식처로 금남로를 지키고 있다. 고개를 들어 옥상 높이의 위치에 자리한 ‘5·18 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을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영령들의 눈물로 얼룩진 서글픔이 입가에 맴돌았다.

광주의 미래가 담긴 문화공간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거대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이 보인다. 지난 2015년 11월 개관한 이곳은 인권과 평화의 의미를 예술로 승화한 콘텐츠를 갖춘 복합문화공간이다. 지상에 우뚝 솟은 다른 문화시설과 달리 지하 20m 깊이에 전시관이 자리해 가히 광주의 핫 플레이스로 꼽힐 만하다. 주변의 옛 전남도청 등 보존 건물을 제외한 이곳의 신축 건물은 모두 지하에 건립됐다. ACC의 핵심 요소는 야외 공연장을 비롯해 연극, 무용, 클래식 등 실내 공연 극장과 어린이 전용 공연장이다. 특히 실내는 지하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건물 곳곳에 빛의 통로인 약 70개의 천창을 설치해 낮 시간대에는 자연의 빛을 받아들이고 밤에는 건물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을 지상으로 발산한다. 콘텐츠의 수준도 높다. 매년 열리는 ‘ACC 월드뮤직 페스티벌’은 아시아와 광주를 잇는 뜻깊은 축제로 세계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휴관 상태지만 온라인(www.acc.go.kr)을 통해 양질의 인문학 강연을 개최하며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나눔의 의미를 실천 중이다. 입장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ACC 주변을 걸었다. 뒤편으로 가보니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외벽에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는 평화와 인권의 가치가 담긴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느덧 점심시간, 꽃으로 장식된 주변 산책로엔 많은 인파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산책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전해졌다, 일상이 된 광주의 ‘평온’ 앞에.

세계기록유산을 통해 되새기는 역사


전일빌딩245에서 금남로 시계탑 반대 방향으로 3분 정도 걷다 보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나온다. 이곳은 5·18민주화운동의 생생한 기록물과 방대한 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광주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곳이다. 1층부터 3층, 6층을 상설 전시장으로 사용 중이다. 1층은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메시지와 기록물 등이 조형물로 꾸며졌다. 정병흠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1층 전시실에 입장한 기자는 한 조형물을 보고 충격에 발걸음을 멈췄다. ‘피로 물든 금남로’라는 이름의 조형물로 리어카에 ‘요금 1개당 200원’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시 공수부대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시신을 운반하는 리어카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참담함을 그대로 재현해 많은 분이 볼 때마다 가슴 아파합니다. 옆을 보시면 언론 검열에 침묵하는 언론을 대신해 대학생들이 탄생시킨 ‘투사회보’를 만드는 모형도 있습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절, 진실을 알리기 위한 그들의 투쟁은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학예사의 설명에 가슴이 먹먹했다.

2층 전시관은 동학농민혁명, 광주학생독립운동, 제주 4·3항쟁,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등 5·18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여정이 담겼다. 눈에 띄는 섹션이 있었으니 바로 여성들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공간. 당시 여성들은 감옥에 갇힌 가족을 지키고자 사형수 구명을 위한 혈서탄원서와 전두환 광주방문 저지투쟁을 펼쳤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최루탄 가스에 궁지에 몰린 시민군을 위해 재봉틀로 마스크까지 만든 여성들의 활약은 가슴 뭉클함으로 다가왔다. 5·18민주화운동을 취재한 한 기자의 수첩, 당시 출간된 다양한 언론 및 연구 기록물, 마스크 제작을 위해 사용된 재봉틀 등 생생한 기록물 앞에 카메라 셔터는 끊이지 않았다. 3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과정과 세계인권기록물이 있는 곳이다. 6층은 윤공희 전 천주교 광주대교구장의 집무실로 5·18 관련자 사면을 위해 힘쓴 그의 집무실과 침실이 있으니 관심 있다면 6층까지 오르길 바란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전혀 불편함이 없다.

금남로에서 택시로 약 6~7분 거리에 있는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향했다. 이곳은 1980년 5월 17일, 자정 전남대학교에 도착한 계엄군과 대학생의 첫 충돌이 벌어진 곳으로 5·18민주화운동의 ‘뿌리’로 불린다. 공수부대의 무력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그들의 주검은 학교 안에 매장됐고 후에 발견됐다.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전남대학교 정문은 5·18민주화운동 사적지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문 앞엔 그들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줄 후배들이 활기차게 거닐고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국립5·18민주묘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망월동의 국립5·18민주묘지였다. ‘민주의 문’ 앞에 비치된 방명록에 감사의 한마디를 적기 위해 펜을 들었다. 제일 처음 일행을 맞은 것은 높이 40m의 ‘5·18민중항쟁 추모탑’이었다. 희생자의 혼령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소망을 담아 제작된 이 탑은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푸른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높고 웅장했다. 탑을 기점으로 좌우에는 불의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과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는 대동세상의 모습을 형상화한 ‘대동세상군상’이 자리해 숭고한 기운이 전해졌다.

부당한 국가 권력에 항거한 주역들을 위해 묵념의 시간을 갖고 추모탑 위, 제1 묘역으로 향했다. 그때 깊고 촉촉한 눈빛으로 묘역을 배회하던 한 남자가 들어왔다. 현재 5·18 민주유공자회 상임고문이라며신분을 밝힌 최운용 씨(77세)는 이곳에 묻힌 아내와 5·18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친구들을 만나러 방문했다고 한다. “5월 17일 저녁, 공수부대가 조선대학교에 베이스 캠프를 치고 전남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수많은 학생을 폭행했습니다. 당시 벗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제 아내 역시 공수부대의 최루탄 발포에도 더 열렬히 저항할 수 있도록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며 모두가 한뜻으로 맞서 싸웠던 기억이 또다시 떠오르네요.”

이후 그와 동행하며 2묘역과 5·18구묘역을 방문, 영령을 추모하는 시간을 보냈다. 5·18민주화운동은 두 눈으로 확인해야 진실을 알 수 있다. 지난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광주민중항쟁기간에 발생한 희생자는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었다 이후 공식적으로 사망자 207명, 부상자 2392명, 행방불명자 910명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정확한 희생자의 숫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확실한 건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2020년의 자유가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의 흔적을 따라 광주로 떠나는 5월의 여행, 올해 가장 뜻깊은 발자취가 될 것이다.

유재기 사진 임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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