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탁환. 바다와 거인이 사는 고향 진해

AS TIME GOES BY | 작가의 고향을 찾아 #4

해군사관학교 국어교관을 지내던 시절, 퇴근 후면 근처 ‘흑백다방’에서 소설을 썼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고전소설로 박사과정을 수료했을 때만 해도 몰랐으나 서서히 인생이 글로 향했다. 가슴속에 똬리 튼 이야기들이 진해 앞바다를 배경으로 소설에서 살아났다.

김탁환 사진 임익순

송곡항에 위치한 진해루에 올라선 김탁환 작가가 멀리 진해 바다를 내다보고 있다. 진해루 뒤편에는 해군기본군사훈련단이 있는데 훈련받을 때 바다 입수하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진해 군항제가 열리지 못했다. 전염병이 돌아도 수십만 그루의 벚나무는 흰 꽃을 피워 올렸지만, 봄을 완상하는 것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먼저였다. 벚꽃이 지고 난 후 고향을 찾기는 처음이었다. 3월 말이나 4월 초 봄나들이의 목적지는 언제나 진해였다.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고등학교 때 읽고도 매혹되지 않았다. 익숙했던 것이다. 비록 국경은 아니지만, 장복산을 관통하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온통 흰 세상이 펼쳐졌다. 밤의 끝에도 어둠에 덮이지 않았다. 겨울을 상징하는 눈(雪)의 하양이 아니라 봄을 만끽하는 벚꽃의 하양이었다.

나는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 41-1에서 태어났다. 중원로터리 근처 평안의원과 진해제과 사이다. 평안북도 영변에서 월남한 친가는 부산 국제시장을 거쳐 진해 중앙시장에서 가방을 팔았다. 일제강점기에 도일(渡日)했던 외가는 귀국선을 타고 돌아와선 진해 중앙시장에서 구멍가게를 열었다. 가방가게 둘째 아들과 구멍가게 셋째 딸은 진해남부제일교회 중고등부를 함께 다녔고, 종종 복식조로 올 탁구 시합을 즐기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했다. 결혼 후 두 아들을 진해에서 낳았는데, 내가 첫째였다. 동생과 나는 진해와 마산과 창원을 옮겨 다니며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장복터널과 안민터널이 새로 뚫려 마산과 창원에서 진해를 오가는 길이 좋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굽이굽이 산길을 2차선 도로로 올라가선 마진터널을 지나야 했다. 터널을 지나면 검문소였고, 모든 차량이 무조건 멈췄다. 버스에 올라탄 헌병은 거수경례를 하고 뒷좌석까지 큰 걸음으로 걸어왔다 갔다. 여기서부터 해군의 도시 진해였다.

진해탑에서 내려다 본 진해 전경. 진해의 바다와 정서가 그를 키웠고 작가의 길로 인도했다.

창원으로 이사한 후에도 초등학교 저학년까진 주말이면 꼭 진해로 갔다. 가족탕에서 다 같이 텔레비전도 보고 목욕도 했다. 목욕을 마친 뒤에는 백장미 제과점에서 빵을 사 먹었다. 그 당시엔 ‘양어장’이라고 불렸던, 진해 내수면 환경생태공원으로 나들이도 갔다. 진해탑으로 이어진 365 계단을 오르기 싫어 달아나기도 했다. 뭐니 뭐니 해도 군항제에 대한 기억이 가장 많다. 중학교까진 가족이나 친척과 함께였고, 고등학교 입학 이후론 여학생이 낀 친구들과 같이 갔다. 가장행렬에 이어 중원로터리 특설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근사했다. 한 줄로 늘어선 수병들의 일사불란한 집총 시범은 몇 번을 봐도 멋있었다. 훗날 우리 형제를 비롯하여 진해에서 태어난 남자들이 해군에 입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는 장복산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아버지는 천자봉 공동묘지에 묻혔다. 진해에 살던 사람들은 죽어서 벚나무가 된다는 아버지의 농담이 성묘를 갈 때마다 떠올랐다. 진해엔 고약하든 해맑든 영혼이 깃들만 한 벚나무가 꽤 많았다.

 

이순신과 김구의 도시, 그리고 소설  내가 다시 진해로 돌아온 것은 1995년 3월이다. 해군학사장교 89기로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석 달 동안 훈련을 받았다. 지금은 사령부 뒤로 해안을 따라 4차선 도로가 나고 진해루 해변공원까지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입대했을 때는 해안까지 전부 훈련장이었다. 동기들과 함께 짭조름한 맛을 온몸으로 느끼며 바다 적응훈련에 열중했다. 1995년 가을학기부터 해군사관학교 교수부 사회인문학처 국어교관으로 근무했다. 생도들에게 국어와 작문, 그리고 해양문학을 3년 동안 가르쳤다. 장편소설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첫 소설을 썼던 다방 흑백. 1921년 지어진 건물은 자식 세대까지 이어지며 고스란히 유지되었다. 그러나 최근 그네마저 세상을 떠나 향후 다방의 운명이 작가는 심히 마음이 쓰여보였다.

퇴근 후 가장 많이 간 곳이 흑백다방이었다. 1955년부터 고전음악과 함께 예술의 향기를 뿜어낸 이곳에서,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연애를 했고, 나는 첫 장편 <열두 마리 고래의 사랑 이야기>와 두 번째 장편 <불멸(개정판 제목은 불멸의 이순신>을 썼다. <불멸> 초고를 완성한 새벽, 대취하여 흑백다방 담벼락에 기대앉기도 했다. 흑백과의 인연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2017년 진해 도보여행기 <엄마의 골목>을 출간했을 때, 흑백에서 강연회를 연 후 독자들과 함께 골목을 구석구석 걸었다. 이번에도 흑백부터 찾아갔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아버지 유택렬 화백에 이어 흑백을 지켜온 피아니스트 유경아 선생이 지난 1월에 소천한 것이다. 신작을 내면 피아노와 소설이 뒤엉켜 노는 자리를 흑백에서 갖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습작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대흥119안전센터 뒤 자취방을 나와 속천항으로 갔다. 버스를 타지 않고 중원로터리를 지나 터벅터벅 걸었다. 정박한 고깃배들이 파도와 바람에 엇박자로 삐걱거렸고 횟집에선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갈매기들이 시끄럽게 울었다. 처음엔 여기저기 마음 내키는 대로 주저앉다가 겹겹이 놓인 섬과 섬 사이로 바다가 제일 멀리까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습작을 시작했지, 소설은 내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장르라고 여겼다. 십년 남짓 문학을 두루 섭렵한 뒤 미지의 영역으로 소설만이 남았을 때, 내 신분은 해군 소위였고 근무지는 진해였다. 고향이 진해인 것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진해로 돌아와 습작을 시작한 것도, 게다가 그때 내가 해군사관학교 국어교관이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크나큰 행운이다. 하지만 속천항에서 밤을 새워 고민하다가 새벽을 맞을 때는, 다시 출근하기 위해 중원로터리를 지나 자취방으로 걸어갈 때는, 과연 내가 소설가로 끝장을 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진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도 이순신 장군이었다. <불멸의 이순신>은 그렇게 탄생했다.

북원로터리 이순신 장군 동상은 진해의 상징이다. 꽃이 지고 관광객이 오지 않는 계절에도 동상 앞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우러러 보는 이도 있었고 두 손을 모은 채 고개 숙여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역사소설에 도전할 마음을 먹자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동상을 보러 갔다. 동상 앞에 서진 않았다. 로터리를 빙빙 돌며 동상의 전후좌우를 살폈고, 배경으로 깔리는 풍경들을 확인했다. 장군의 일생을 풍부하게 그리면서, 입체감을 살려 인간적인 고뇌를 쓰고 싶었다.

백범 김구의 친필 시비. 남원 로터리에 우뚝 선 시비의 위쪽 구석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시비를 훼손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18년 봄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때, 교정에서 또 다른 이순신 장군 동상과 맞닥뜨렸다. 장군의 손엔 활이 들려 있었다. 그 자세에서 활과 함께 심신을 단련한 일상이 묻어났다. 검을 지닌 이순신 장군 동상에 이어 활을 든 이순신 장군 동상까지 세운 진해가 믿음직스러웠다. 남원로터리에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가 있다. 1946년 진해를 방문한 김구 선생은 이순신 장군의 한시 ‘진중음(陣中吟)’에서 “서해어룡동 맹산초목지(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란 시구를 옮겨 썼다. 바다를 두고 서약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준다는 뜻이다. 북원로터리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고, 나는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대하소설 <불멸의 이순신>을 썼다. 남원로터리에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가 있고, 나는 김구 선생이 주인공인 장편소설 <대장 김창수>를 썼다. 이것이 우연일까. 우연이라 여기며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로터리들을 다시 돌며 확신이 흔들렸다. 진해에서 태어나 자라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의 두 거인인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을 소설로 옮겨보겠다는 바람을 가졌을까.

이 질문은 내가 쓴 장편소설에 바다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삼국과 고려와 조선의 바다뿐만 아니라 근대와 현대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해양소설을 거듭 써온 것이다. 진해 바다와 그 바다에 얽힌 사람들의 운명이 내 가슴 밑바닥에서 썰물과 밀물처럼 출렁거렸는지도 모른다. 바다 이야기라면 유난히 심장이 빨리 뛰는 소설가가 바로 나였다.

 

진해에서 두 번 태어났다 부엉산이라고도 불리는 제황산 진해탑은 서울로 치자면 남산 타워와 같은 곳이다. 1929년 일본이 세운 러일전쟁전승기념탑을 부수고, 1967년 군함 모양을 본떠 9층으로 세웠다. 어릴 때는 진해탑까지 이어진 계단이 과연 365개인가를 놓고 친구들 과 다투기도 했다. 하나씩 헤아리며 오르다가 50개도 되기 전에 헷갈려 처음으로 내려온 적이 많았다. 지금은 그 시절처럼 숫자를 세며 걷는 아이는 없다. 계단 중간중간 숫자를 표시해둔 탓이다. 계단은 365개가 맞았다. 신나는 상상이 따라붙던 이야기들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은 것 같아 조금은 섭섭했다.

촬영 날 동생 김리환 씨가 형님과 동행했다. 지금은 폐쇄된 옛 진해역사 앞에서 형제는 옛 추억을 이야기했다.

진해탑 8층 전망대에 오르기 전 봄 점퍼를 다시 꺼내 입었다. 한여름에도 찬바람이 양볼을 때렸다. 1층에선 빽빽한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지만, 8층에선 거리낄 것이 없었다. 전망대를 360도로 한 바퀴 돌았다. 진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지금까지 내가 주로 즐긴 방향은 남쪽 바다와 세 개의 로터리가 있는 옛 시가지였다. 이번엔 장복산 쪽 풍경이 새로웠다. 초록으로 가득한 숲과 그 사이를 가르던 철조망이 어색했던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창원시와 마산시, 진해시가 통합창원시로 합쳐지고 10년이 지났다. 창원시 진해구는 그새 공기 좋고 조용한 항구로 소문이 나면서 인구가 부쩍 늘었고, 웅천을 지나 용원까지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섰다. 군항의 모습이 바뀐 만큼 진해에서 인연을 맺은 이들의 삶도 달라졌다. 올해 임관 25주년을 맞는 해군학사장교 89기들은 국내외로 흩어져 저마다의 인생을 꾸려가는 중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입대하고 진해에서 보낸 3월을 잊지 못한다. 군항제를 앞둔 시내에서 벚꽃이 휘날릴 때 연병장에선 눈이 흩날렸다던가. 담벼락 하나를 두고 기온이 5℃는 차이가 날 것이라는 한탄이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용인 적산가옥이 길게 이어진 장옥 거리. 일제 때 세워진 계획도시였던 진해에는 그 당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나는 진해에서 두 번 태어났다. 한 번은 사람으로 또 한 번은 소설가로! 약력에 ‘진해로 돌아가 장편 작가가 되었다’고 적을 때마다, 열망만 가득하고 작법을 몰랐던 소설가 지망생을 넉넉하게 품어준 고향이 고맙고 또 고맙다.진해에서 기차를 타기 위해 창원중앙역으로 가려면 안민터널을 지나야 한다. 역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고개를 힘겹게 올라야 했다. 진해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버스나 택시 대신 걸어서 안민고개를 넘은 추억이 있다. 해군교육사령부 군사훈련의 클라이맥스는 야간행군이었다. 완전군장을 한 채 사령부 정문을 나가 시내를 스친 후 2차선 오르막 도로로 접어들었다. 아름다운 야경이 발아래 서서히 펼쳐졌다. 그렇지만 그때는 한 걸음 내딛는 것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곁눈질도 못한 채 바로 앞 훈련병의 등만 보고 걸었다. 하염없이 오르막길을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이 안민고개였다. 고갯마루에서 땀범벅으로 먹은 초코파이 맛을 잊을 수 없다.

어릴 적 작가가 살던 곳. 당시는 적산가옥이었으나 지금은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작가는 옛 집 앞에서 한 번 들어가보고 싶다는 속내를 조용히 읊조렸다.

어머니는 다섯 살 때 기억을 끄집어냈다.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고사리손을 잡고 창원에 있는 친정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고개를 넘어 창원으로 가기까지 하루, 고개를 넘어 진해로 오기까지 하루가 걸렸다. 오르막길은 다섯 살 소녀가 감당하기 벅찼다. 할머니는 설탕을 잔뜩 묻힌 막대사탕을 허리춤에서 주섬주섬 꺼내 울상인 손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차에서 내려 잠시 안민고개를 걷기로 했다. 찬란하게 피어 터널을 만들었다가 꽃을 모두 떨군 벚나무들이 우직하게 서 있었다. 나무들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린 시절 나무를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유난히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줄기의 굵기도, 가지의 방향도, 옹이의 위치도 제각각이었다. 사람은 바뀌어도 나무는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았다. 진해탑의 전망과는 또 달랐다. 나무들이 지배하는 연두와 사람들이 살아가는 암회색을 지나 넓고 깊은 파랑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해는 세 가지 세계가 경계를 짓되 기꺼이 만나 뒤섞이는 곳이었다. 다시 고개를 내려가서, 고속정을 타고 방금 본 섬과 섬 사이 파랑의 끝으로 향하고 싶었다. 봄바다였다.

AS TIME GOES BY | 작가의 고향을 찾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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