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문태준, 내 시의 씨앗이 그곳에 있다, 경북 김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내 삶과 내 시가 자란 곳, 대문을 열면 여전히 어머니와
아버지가 반기는 곳, 고향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 794번지다. 우리 동네에서 김천 시내로 일을 보러 갈 적에는 추풍령에서 출발해 김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나 고약하게도 이 시외버스는 자주 다니지 않는다. 지금도 한 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는데 그마저도 정류장엘 들르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류장에 머물렀다 가는 시간을 내주는 데에는 인심이 후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버스를 놓치지 않는다. 시외버스 기사와 승객들 사이에 노상안면이 있는 정도이기도 하다.
고향에 가면 추풍령에서 김천 시내로 가는 시외버스를 종종 이용한다. 마을에서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시간이 우선 좋다. 왼쪽에는 낮은 산이, 오른쪽에는 넓은 잎의 포도나무밭이 있는 길을 걸어 버스를 타러 갈 때는 어떤 평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조급함과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시간을 걷게 되는 것이다. 조금 일찍 정류장에 도착해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도 좋다. 언제 올지 모르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나처럼 버스를 타러 걸어오는 사람을 보는 일이 좋다. 그러고 있으면 정말이지 시간이 맑은 시내처럼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신라 눌지왕 2년(418)에 창건한 보물 제1576호 김천 직지사 대웅전

나의 가계는 가난했다. 부모님은 논일과 밭일뿐만 아니라 양잠업으로 돈을 벌었다. 어릴 때 안방과 건넌방에 잠박(누에를 치는 데 쓰는 채반)이 가득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뽕잎을 따오는 것은 누나들과 나의 몫이었다. 소와 염소를 몰고 가 야산과 풀밭에서 풀을 먹이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 간간이 친구들과 골목을 뛰어다니고, 묏등을 타고, 산길을 뛰어 오르내리는 일이 있었으나 저녁 무렵에는 쇠죽을 끓여야 했다. 어린 나에게 멀리멀리 바라보는 일은 일과처럼 되었다. 멀리 바라보면 그곳에는 높고 깊은 산이 있었다. 직지사 뒤편의 황악산 높은 봉우리가 멀리 보였다. 먼 산은 신령스러웠다. 비가 처음 생기는 곳이라고 믿었다. 눈보라가 처음 생기는 곳이라고 믿었다. 먼 산에서 비도, 눈보라도, 봄도, 가을도, 심지어 신생한 생명의 영혼도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먼 산 가운데는 도둑골이라는 깊은 골짜기도 있었다. 도둑골은 내 시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싸리꽃이 피면 도둑골에는/ 모가지가 올에 걸려/ 노루가 운다지/ 반나절 가웃 노루가 운다지” (‘봉산댁’ 중)라고 쓰거나 “딱따구리 한 마리가 숲에서/ 목구멍을 치는 소리/ 먹는 입이 저처럼/ 활엽수를 쪼는 딱따구리만큼 맑아질 수 있을까” (‘태화리 도둑골’ 중)라고 썼다. 그곳은 신비하며 이상하고 야릇한 곳이었다. 내게 시를 짓게 하는 힘도 그곳에서 온다고 믿었다.

천불전을 모시는 직지사 비로전의 꽃살문

아버지는 여러 마리의 소를 기르셨다. 우시장에 가서 암송아지를 사오시면 풀을 먹이고 쇠죽을 먹여 키우셨다. 소의 코청에 코뚜레를 꿰어서 농사일을 가르쳤고, 소가 아픈 구석을 당신의 몸처럼 예민하게 아셨다. 송아지가 다 자라 큰 암소가 되고 새끼를 낳으면 그 뜨겁고 새로운 생명을 두 손으로 직접 받으셨다. 물론 여러 마리의 소를 떠나보내셨다. 생계를 위해서, 자식들의 학비를 대려고 길러 온 소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송아지를 맞으셨다. 나는 소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누워서 되새김질하는 소의 나른한 오후를 함께 살았다. 우보(牛步)를, 소의 느린 걸음을 배웠다.
내가 시를 짓게 된 이후로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는 체험 가운데 하나는 쇠죽을 끓이던 일이다. 논둑 밭둑의 풀을 베어오거나 짚단을 작두로 썰어 쌀뜨물과 함께 솥에 넣고 불을 지폈다. 그러면 캄캄하던 아궁이가 붉게 피어났다. 나무를 무릎으로 꺾어 때며 나는 불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때때로 나방이 날아들어 흙벽의 벽면에 검은 그림자로 파닥거리는 것을 보았다.
내 마음이 뭉클함을 느꼈던 최초의 기억은 서너 살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큰누나는 해 떨어질 무렵에 나를 업고 마당을 빙빙 돌았다. 그때의 일을 시 ‘첫 기억’에 썼다.
“누나의 작은 등에 업혀/ 빈 마당을 돌고 돌고 있었지// 나는 세 살이나 되었을까// 볕바른 흰 마당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깰 때 들었던/ 버들잎 같은 입에서 흘러나오던// 누나의 낮은 노래// 아마 서너 살 무렵이었을 거야// 지나는 결에/ 내가 나를/ 처음으로 언뜻 본 때는”
나는 잘 울었고, 큰누나는 나를 업어 달래주곤 했다. 그러면 나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고 작은 가슴에 평안이 왔다. 특히 큰누나가 불러주던 노래의 흐릿한 선율이 아직도 떠오른다. 나의 불안을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려주던 그 낮은 노래는 아직도 나를 감싸고 있다.

직지사로 오르는 길에 펼쳐지는 푸른 소나무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던 기억도 오래 남아 있다. 직지사를 가거나 용화사에 갔다. 햅쌀을 이고 어머니는 절에 가셨다. 용화사에 가서는 석불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셨다. 나는 요즘도 김천에 가면 직지사와 중암, 그리고 용화사에 간다. 직지사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새해 첫날에 혼자 찾아가서 기도를 올린 곳이고, 용화사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자주 찾던 절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용화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아래에 서면 그 온화한 미소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용화사 전각에 봉안된 금릉 덕천리석조관음보살입상

김천은 자두와 포도의 산지다. 우리 집도 자두 농사와 포도 농사를 지었다. 7월에는 자두를 땄고, 8월에는 포도를 땄다. 자두와 포도를 담을 나무 궤짝을 일일이 짜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자두와 포도를 딴 후 오후 내내 뒷마당에서 못질을 해가며 궤짝을 짰다. 그러나 무엇보다 포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다. 물론 해마다 작황이 좋지는 않았다. 하늘이 내려주는 강우와 햇살에 기대어 짓는 농사인 만큼 작황의 좋고 나쁨이 들쑥날쑥했다. 느닷없이 서리가 내리거나 우박이 쏟아지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런 해에는 겨우 궁기를 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 농사가 아니었다면 우리 집 가세가 일어서는 일은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폭염 아래 탱글탱글 영그는 포도밭 풍경은 내 시에 여러 번 등장한다.

시골집에 가 포도송이를 만지면
새로이 꽃모종하고 싶네
하느님을 향해 둥근 종도 치고 싶네
들바람을 안은
나직한 오므림
얹힘 위에 얹힘
수긍하는 모양새
뒤도 매끈하지
이것은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
빛과 물과 노을과 공기의 합작
입에 먼저 넣어줄 자식을 둔 어미처럼
손바닥으로 고이 받쳐드네
– ‘8월의 포도원’ 전문

내 가족은 8월 한 달 내내 포도밭에서 일을 했다. 포도를 따고 선별해서 시장에 냈다. 어머니의 야무진 성격 덕분에 우리 포도밭에서 생산되고 포장된 포도들은 늘 최상급의 품질을 인정받았다. 상인들이 우리 포도밭에서 생산된 포도들을 사기 위해 서로 다툴 정도였다.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는 내 시의 태생지다. 이 본적지에서 나는 울음과 함께 태어나 자랐고, 나의 시심도 더불어 자라났다. 그곳에는 내 시의 한 컷이 된 것들이 아직 살아 있다. 국수를 말아 먹던 평상을 잊지 못하겠다. 목물을 하던 여름 대낮을 잊지 못하겠다. 자꾸자꾸 늘어나던 빈집들을 잊지 못하겠다. 산으로부터 길게 내려오던 왕성한 산 그림자를 잊지 못하겠다. 동산에서 놀고 있는 나를 부르던 누이의 긴 목소리를 잊지 못하겠다. 봄날의 아지랑이와 짧은 낮잠을 잊지 못하겠다. 여름 소나기를 피하던 처마 밑의 한때를 잊지 못하겠다. 복숭아와 자두와 포도와 사과와 돌배가 익어가던 시간을 잊지 못하겠다. 삶아낸 고사리 냄새를 잊지 못하겠다. 죽은 새를 묻어주었던 뒷산을 잊지 못하겠다. 여울처럼 흐르던 은하수를 잊지 못하겠다. 뒤란에 가서 울던 날들을 잊지 못하겠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의 작은 동산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오후의 빛이 동산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나의 또래들과 그 동산에서 풀빵을 구워내듯이 추억을 구워냈다. 나와 나의 또래들은 집에서 기르고 있던 염소들을 한 마리씩 몰고 동산에 모였고, 우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동산에서 만나 서로의 눈을 맞추는 순간 염소를 동산에 풀어놓아 주었다. 물론 쥐고 있던 고삐를 풀어 염소를 동산 속으로 보내면서 우리도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다. 그리하여 동산에는 오후 내내 나와 나의 또래들이 어울려 노는 높은 목소리와 풀 뜯는 염소들의 울음소리와 오후의 빛이 서로 경쟁하며 넘쳤다.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하나의 무한한 전체’였다.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김천 봉산면 태화2리의 고향집이 새 단장을 했다, 이곳에는 여전히 시인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날이 밝으면 자연으로 가셨고, 날이 저물면 자연에서 나오셨다. 나의 아버지는 지게에 가득 가족을 먹일 곡식과 짐승을 먹일 풀을 지고 오셨고, 나의 어머니는 식구들이 저녁에 먹을 채소와 다음 해에 심을 씨앗을 이고 오셨다. 저녁이 되면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의 품에서 얻어올 것이 무엇일지 궁금해했고, 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으로부터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렸다. 나의 누나가 나를 업고 집 밖 골목까지 나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면 캄캄한 어둠의 커튼을 밀쳐내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자연의 들과 자연의 골짜기로부터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하루 종일의 노동으로 몹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우리를 보시는 순간 환하게 웃으셨다. 물론 왜 집 밖을 나와서 기다리느냐는 꾸중을 괜히 한 차례 하시면서.
나는 시를 쓸 때마다 자연의 세계로 간다. 거기에는 공동의 물품을 함께 사용하는 생명들이 있다. 우리는 산의 기슭과 봉우리를 공유하고, 구불구불한 곡선의 산길과 들길을 공유하고, 평온한 저수지를 공유하고, 수로의 깨끗한 물과 들판 곳곳에서 솟는 샘물의 맑음을 공유한다. 햇빛과 빗방울과 눈보라와 천둥과 토양을 공유한다. 선물로 들꽃을 서로 주고받고, 서로의 언어를 불어가는 바람에 실어 보낸다. 우리는 바위처럼 침묵할 때에는 물론 덤불 속의 새떼들처럼 많은 말을 주고받을 때에도 서로의 마음을 잘 이해한다. 많은 일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만 자연 속에서 있었던 일들은 마치 어머니께서 자연으로부터 이고 오던 씨앗과도 같아서 나의 기억 속에서 새순이 돋고 또 자라난다. 내가 쓴 시는 대개 그 씨앗으로부터 자라나는 새순이며 줄기이며 열매이며 이듬해에 심을 씨앗이다.
시는 하나의 기도다. 한 편의 시를 통한 나의 기도는 작은 것이다. 나의 기도는 풍경을 떠올려 그 풍경이 내 마음 속에 살게끔 하는 것이다. 내가 떠올리는 풍경은 예를 들면, 바람과 햇살에 빨래가 말라가는 풍경, 산달(山月)이 막 떠오르는 풍경, 봄나물을 바구니 가득 담아서 들길을 돌아오는 풍경, 빨간 앵두가 소반에 담겨 있는 풍경, 우물로부터 한 두레박의 물이 쏟아지는 풍경, 목탁 소리가 들리는 절 풍경, 돌아온 제비가 재재거리며 전깃줄에 나란히 앉아 있는 풍경, 가을 하늘 아래 푸른 사과가 열려 있는 풍경, 길게 매달린 고드름이 녹으면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풍경,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짐을 대신 들고 가는 풍경, 밥을 퍼주는 풍경 등등이다. 이런 풍경들에 좀 더 근접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기도이며 나의 시다. 기도는 나의 작은 불씨로부터 피어나 바깥을 보살피고, 바깥을 다 보살핀 후 내게로 돌아와 내 불씨의 심지를 다시 돋운다.
김천시 봉산면 태화2리 그곳에는 아직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계시고, 그곳은 여전히 내 삶과 내 시의 주소지다. 봉산면 태화2리는 여전히 내 몸에서 흘러넘친다.

문태준 사진 손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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