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권지예의 경북 경주, 내 영혼과 생명의 뿌리

고향에서 지낸 시간보다 고향을 떠나 지낸 시간이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은 고향이다. 언제라도 나를 품어줄 그런 곳이다.

 

현대인에게 고향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어릴 때 고향을 떠나 줄곧 서울에서 살았고, 1990년대에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8년을 살았다. 하지만 지구 어디에 살아도 내 고향은 변함없다. 고향이란 생애 최초의 운명이다. 내가 잉태되고 태어나 유년을 보낸 곳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이다. 그러니 내 영혼과 생명의 뿌리는 경주다. 그곳은 대대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상들이 살아오신 곳이다. 천년 도읍지 경주는 천년을 넘어 지하의 수맥처럼 내 뿌리를 면면히 적셔왔으리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은 내가 태어난 곳과 지척이다. 아버지는 양동마을 입구에 있는 양동초등학교를 다니셨다. 양동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역사를 지닌 경주(월성) 손씨와 여주(여강) 이씨의 대표적인 양반 집성촌이다. 아버지의 둘째 누님인 올해 96세의 고모님은 여주 이씨와 혼인하셔서 현재도 양동마을에 살고 계신다. 아버지는 할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막내아들이었다. 그래서 사촌 오빠들이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았고, 나와 동갑인 큰조카는 젖먹이 시절 나와 함께 자랐다. 말문을 떼는 돌 무렵 아기 때부터 나는 고모 소리를 들었고, 20대 처녀 시절엔 할머니 소리를 들었다. 반대로 어머니는 7남매의 맏이로 막내 외삼촌은 나보다 어렸다. 경주시 안강읍이 고향인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셨던 삼촌의 제자인 아버지와 후에 인연이 되어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출향했지만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치셨다. 돈을 벌면 도시에 투자하기보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길 꿈꾸시며 고향에 황소를 샀고 과수원을 샀다.
나는 부모님이 결혼 후 본가와 멀지 않은 곳에 분가해서 살았던 작은 기와집에서 태어났다. 오래전 부모님과 함께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과수원에서 언덕에 위치한 작고 낡은 기와집을 가리키며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저곳이 니 생가인데, 혈이 모인 곳이라 좋다카더라.” 유년의 기억이 동화의 삽화처럼 언뜻언뜻 떠오른다. 생가의 툇마루에서 나비춤을 추며 놀다 자주 떨어지거나, 어른들의 술심부름을 하러 주전자를 든 고종사촌 언니의 등에 업힌 내 눈에 고향의 산야가 주마등처럼 흐르던 모습은 꿈이었을까. 그것을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들은 말이 나의 기억 속으로 스며들어버린 걸까. 2002년에 발표한 내 단편 소설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에는 고향의 모습이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 외가로 가는 길은 고향을 가로지르는 형산강의 강바닥을 걸어서 갔다.

“버스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난간도 없는 콘크리트 다리 밑은 강. 그러나 강물은 말라 있다. 강심(江心)까지 말라붙어 드러난 바닥의 조약돌들, 겨울 오후의 햇빛 속에서 데면데면하다. 형산강의 지류일까, 강이라고 하기엔 그저 넓디넓은 자갈밭. 기억 속의 강은 한 번도 물을 품은 적이 없다. 강물도 다리도 없던 황량한 강, 저 강을 서너 번쯤 걸어서 건넌 기억이 있다. 어릴 때엔 강바닥인 자갈밭을 뒤뚱뒤뚱 넘어질 듯 걷노라면 늘 누군가가 등을 대주곤 했다. 외할머니나 엄마의 등.”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이 되면 고향에 내려가 큰집이나 외가에 머물렀다. 내게 고향의 과수원은 고향으로부터 올라온 크고 맛 좋은 사과뿐 아니라 잊지 못할 추억이 많은 곳이다. 어느 날 사과 박스와 함께 또 다른 박스 몇 개가 서울집으로 왔다. 그 박스에는 깨진 그릇들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좋은 품종의 사과나무를 심기 위해 과수원 땅을 파헤치다 나온 신라시대의 토기였던 거다. 성한 그릇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작고 온전한 게 몇 개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몰래 훔쳐 다락방에 숨겨놓고 소꿉장난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어머니가 죽은 사람들과 천년 동안 묻혀 있던 유품인 깨진 그릇들이 찝찝하다며 내 애장품까지 몽땅 고물 장수에게 줘버렸다는 말에 하루종일 통곡했다. 과수원의 원두막은 내게는 고향의 놀이터였고 은둔지였다. 사춘기 시절, 나는 그곳에서 삶의 비의(?) 같은 걸 느낀 체험이 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브의 사과’가 아닌 누군가 베어먹은 사과 한 알에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고향은 에덴동산과 같은 낙원이었던 걸까. 아래 묘사를 지금 보니, 내 근원과 닿은 고향을 어쩌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문학전집 같은 걸 읽다 책 위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란은 잠이 깬 채로 미동도 없이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망막에 맺힌 풍경이 한순간 의식의 틀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오는 느낌이 왔다. 이상하게 먼 곳의 풍경부터 선명하게 들어왔다. 멀리서부터 서쪽 하늘에 노을이 번지는 게 보였고 마지막 햇살을 받은 도열한 사과나무들의 빛나는 우듬지가 차례로 보였고, 가지마다 푸른 풋사과들이 비낀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원두막의 오래된 통나무 기둥이, 그리고 더 가까이에…. 바로 눈앞에 어떤 물체가 부우옇게 시야로 들어왔다. 란은 두 눈을 깜박였다 크게 떠보았다. 그건 사과 한 알이었다. 누군가 한 입 크게 베어 먹다 만 사과 한 알이 구르다가 어느 순간 모로 누워 고요한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듯 보였다. 퇴색하여 회색빛으로 변한 원두막의 마룻장 위에 베어 먹힌, 속살이 누렇게 변색 된 사과 한 알. 베어먹은 사과 한 알 너머로 원두막의 처마와 기둥이 액자가 되어 사과나무들과 홍옥처럼 익어가는 석양과 여름 저녁 하늘을 그림처럼 담고 있었다. 모든 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란은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사과 한 알을 쥐고 눈앞으로 가져와 보았다. 외롭고, 완전하지 않은…. 훼손된 삶의 예감일까. 무엇인지, 눈물겨운 느낌 때문에 눈꺼풀이 뜨거워졌다.”

어린 소녀의 예감대로 완벽한 인생은 없었다. 소녀는 삶이 훼손되어가는 과정을 겪으며 그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게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거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고향에 자주 오지는 못해도 나는 경주에 오면 많은 위로를 받게 된다. 특히 어머니의 젖무덤처럼 부드럽고 둥근 곡선. 바라만 보아도 좋은 그것은 시내 어디에나 있는 커다란 고분들이다.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번화가에 동산만큼 커다랗고 아름다운 죽음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풍경은 세계에서도 경주가 유일하지 않을까.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경주는 가끔 이 세상의 도시 같지 않다. 특히 봉황대(노동리 고분군)를 바라보면 <어린왕자>의 세계 속에 있는 느낌이 든다. 거기 세 그루의 느티나무 고목이 뿌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 마치 세 그루의 바오바브 나무가 자라는 어린왕자가 사는 별 B 612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별보다 큰 봉황대는 신라시대 무덤 중에서 단일 무덤으로는 제일 규모가 크다. 힘들고 지칠 때면 경주의 푸르고 큰 옛 무덤들이 그리워진다.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가면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능이 등장한다

경주에는 여러 왕릉이 있지만 내가 자주 가는 왕릉은 통일전 근처의 헌강왕릉과 근처의 정강왕릉이다. 다른 화려한 왕릉에 비해 소박하지만, 어느 봄날 늦은 오후에 우연히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 아름다운 소나무 숲길 안에 숨은 왕릉을 발견했다. 살아 꿈틀대는 듯한 소나무들 사이로 걸러진 석양빛에 만발한 진달래가 붉었고, 사위는 너무도 적막하고 새소리만 들렸다. 그저 거기서 발을 멈추고 숨을 쉬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 그 길을 지날 때면 잠깐 들어가서 숨을 크게 쉬고 나온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창건한 감은사는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석양에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 시간이면 감은사지로 간다. 이곳은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바다로 가는 길에 있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완공하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 신문왕이 그 유지를 이어서 감은사를 완공했다. 신라의 설화에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나라의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위섬에 묻힌 문무왕이 아들 신문왕에게 대나무를 보내어 그것으로 피리를 만들어 불라고 한 전설상의 피리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감은사(感恩寺)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것은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대를 이은 왕들의 그런 충정도 이제는 절터에 두 개의 3층 석탑만이 부자(父子)의 넋처럼 오롯이 남아 석양을 쓸쓸히 받고 있는 그 모습이 내 마음을 끌어당긴다. 통일신라는 남북이 분단된 현재의 남쪽 땅보다 국토가 훨씬 더 넓었을 텐데, 도읍지가 이 남쪽의 도시 경주였다니 그 옛날 화려한 영화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황량한 겨울날 까마귀 떼가 날아드는 폐사지의 모습은 불멸과 소멸의 역사를 증거하기에 충분하다. 완전한 어둠이 찾아오면 예전에 안압지로 부르던 동궁과 월지의 아름다운 야경을 빼놓을 수 없다. 연못의 수면이 청동거울처럼 누각을 비춰 데칼코마니의 작품이 되는데, 점등이 되면 누각의 석벽이 조명을 받아 호박색으로 한층 화려해진다. 녹음 짙은 여름밤이나 단풍이 든 가을밤의 조명받은 정원수를 돌며 밤 산책하는 맛을 수년 전에 알게 되었다. 차가운 날씨에 따뜻한 조명을 받는 건물과 연못은 한층 따스하게 느껴진다.

영화 <경주>의 모티브가 된 전통찻집 능포다원에서 마시는 따뜻한 황차 한 잔

추위를 잠시 녹이기 위해 찾아간 찻집 능포다원은 경주 대릉원 일원인 봉황대와 노서리 고분군에 인접해 있는데, 건물들 사이에 반전처럼 고옥이 숨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곳이 2014년에 개봉한 박해일, 신민아 주연의 영화 <경주>의 모티브가 된 전통찻집이다. 발효차인 황차와 서비스로 내주는 백초 진액을 전통과자와 함께 맛볼 수 있다. 젊은이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식당과 카페가 많은 황리단길도 좋지만, 오래된 도시에서는 장독대에서 오래 묵은 장이나 오래 발효된 차들이 잘 어울리기도 한다. 경주는 나만의 고향이 아니라 한국인에게 마음의 고향처럼 오래도록 사랑을 받던 곳이며, 요즘은 외국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흥미로운 여행지이자 관광지다. 예전에 그 많은 고분이나 왕릉에서 어린 시절에 미끄럼을 타고 놀던 고향의 아이들과 교교한 달빛 아래 동산 같은 무덤 위에서 술 한 잔 기울이던 청년들은 고향을 떠나 어디에 가서 살았을까. 이제 나이가 들어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뽑힌 지 오래고, 아버지는 귀향하기에는 너무 늙으셨다. 만인의 고향인 경주를 고향으로 둔 나는 마치 만인의 연인을 아내로 둔 남자처럼 고향 경주를 생각하면, 자부심과 쓸쓸함을 느낄 때가 많다. 내 고향 경주는 한때 천년의 지복과 화려한 영화를 누린 곳이지만 태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삶이 늙고 낡고 훼손되어가듯이, 요즘 같은 포스트자본주의 시대엔 유적과 유물에 깃든 역사와 문화, 인간 정신조차도 점차 소외되고 소멸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언제나 고향은 애틋하고 쓸쓸한 곳. 그래서 향수(鄕愁)란 단어가 있지 않은가. 인간에게 신을 주지 못해 어머니를 주었듯이, 신은 인간의 생전에 낙원을 줄 수 없어서 고향을 주지 않았을까.

권지예 사진 손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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