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상식 사전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태극기를 든 사람들이 모여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기억해야 할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이 더 있다.

 

  • 3·1운동은 대한제국의 광무제, 고종의 독살로 촉발됐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의 갑작스러운 붕어(崩御)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석연치 않았다. 건강하던 고종은 식혜를 마신뒤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져 숨을 거두었고, 더욱이 시신의 이가 모두 빠지고 목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길게 나는가 하면 시신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유언비어 처럼 떠돌던 고종 독살 의혹은 2011년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을 확인하며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독살을 지시한 것은 총리대신인 데라우치로 ‘1905년 을사보호조약 문서에 날인을 거부했던 이태왕(고종)에게 승인을 요구해 보고 거부하면 없애라’고 지시했다는 것.

그리고 실제 1월 18일 승인을 요구하던 조선총독부를 호통쳐서 내쫓은 이틀 뒤 고종은 붕어했다.

 

  • 일본 유학생들이 적진에서 대한독립을 외친 2월 8일

고종의 붕어 소식은 우리 땅은 물론이요 만주와 일본에 있던 우리 민족의 마음에 분노의 활시위를 당겼다. 특히 적진의 심장인 도쿄 한복판에 모인 도쿄 조선청년 독립단은 일본 식민 정치의 그릇됨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등 11명(이 중 3명은 이후 변절하여 친일 부역)은 그렇게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관에서 한국유학생 대회를 열고 수백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며 2·8 독립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후 2·8독립선언서는 각국 대사관과 신문사 등으로 보내졌고 이로부터 나흘 뒤 다시 한 번 도쿄 한복판에서 유학생 1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2·8독립 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 민족대표 33인 중 29인만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였다

우리 땅에서는 3·1독립만세운동이 계획돼 있었다. 독립운동의 씨앗은 1918년 1월 8일 당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의 ‘평화원칙 14개 조’ 에 제시된 ‘민족자결주의’ 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3인이 손병희를 찾아가 의견을 모았고 천도교(동학), 기독교, 불교가 함께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썼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1, 2차에 나눠 총 3만5000장을 인쇄하고 3월 1일 역사적인 봉기를 다짐했다. 그렇게 다가온 3 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 중 4명을 제외한 29인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만세삼 창과 독립선언 축배를 들고 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린 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 3·1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서만 열린 것이 아니다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서울과 평양·의 주·선천·안주·원산·진남포 등 7개 도시 에서 동시에 시작됐다. 서울의 집결지는 종로의 탑골공원이었다. 원래 민족대표 33인도 이곳에 모여 함께 만세운동을 하기로 했으나 갑자기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한 탓에 거행장소로 모인 군중은 오후 2 시 30분 경 군중 중 한 명인 정재용의 독립 선언서 낭독 이후 종로, 서울역, 정동, 이화 학당, 서대문 등지로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독립만세운동은 이후로도 계속돼 3월 3일 고종 인산(장례)에 모여든 군중의 시위 행렬이 있었고 5일에도 남대문역 광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0일 이후부터는 경상도와 전라도 등 중남부 지역으로 확산됐고 일본은 무자비하게 이들을 체포하고 학살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 혈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200만여 명이 참여해 그중 7500여 명이 살해당했고 검거자 수는 무려 4만6000 여 명에 달한다. 이화학당 학생이던 유관순 열사는 3·1독립만세운동 이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지휘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고문을 받다 순국했다.

 

  •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3·1독립만세운동이 격렬하게 퍼져나가며 일본제국은 시위 참가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잡아들였다. 당시 서대문감옥을 크게 고쳐 짓는 것으로도 모자라 서울 공덕동에 감옥을 새로 짓기도 했다. 독립운 동가들은 안전하고 짜임새 있는 활동을 위해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대한민국임시 정부’는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가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의 명칭이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임시의정 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 이승만을 국무총 리로 하는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임시정 부를 구성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대미외교를 펼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전방위 활동을 펼쳐나가다 1945년 8·15 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환국한 뒤에는 서울 강북삼성병원 옆 경교장에 터를 잡고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4년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된 백범 김구는 경교장에서 집무를 보던 중 1949년 6월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서거했다.

 

  • 3·1운동을 해외에 널리 알린 이들의 도움도 컸다

서울 종로구 행촌동 저택 딜쿠샤는 3·1운 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앨버트 테일러의 거처였다. 미국인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의 요람 밑에서 간호사 들이 일본 감시를 피해 숨겨놓은 독립선 언서를 발견한 뒤 관련 기사를 써 한국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렸고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 현장을 찾아 일제 탄압 역사도 기록했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앨버트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로부터 300여 건의 유물을 추가 인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로 인수할 유물에는 메리 테일러가 한국에서의 생활을 쓴 책 <호박목걸이>의 친필 원고를 비롯해 딜쿠샤에 살 때 사용하던 물품과 각종 공예품, 인물사진 등이 있다. 서울시는 딜쿠샤를 복원해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민에게 개방할 계획이었으나 지연 되고 있다.

딜쿠샤는 고대 인도어로 ‘이상 향’을 뜻한다. 그 밖에 34번째 민족대표로도 알려진 스코필드 박사 역시 독립운동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뒤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엄주혜 사진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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