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양온소 예술주조

누구나 힘을 비축해야 할 때가 있지.
달려 나가다가도 멈춰서고, 내가 누구인지 많은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할 때도 있는 거야.

 

 

전국에 ‘예술ʼ과 같은 공간이 늘어난다면

지난여름 다녀온 홍천은 끝도 없는 은행나무가 대궐을 이룬 숲과 정자에 앉아 바라봤던 짙푸른 내린천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로부터 한 계절을 건너뛰고 홍천을 갔다. 생생하던 나무들은 그사이 모두 무거운 옷을 벗어 제 뿌리를 낙엽으로 덮어주고 있었다. 뜻 없이 그 위를 걸으며 변화의 의미를 새겨들었다.

“누구나 힘을 비축해야 할 때가 있지. 달려 나가다가도 멈춰서고, 내가 누구인지 많은 사람 속에서 찾아야 할 때도 있는 거야.”

시간의 변화에서도 홍천에는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전통주조 예술’(이하 예술)의 정회철 대표와 그의 아내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전국의 이곳저곳을 다녔더랬다. 남편은 보는 데마다 마음에 들어했지만 아내는 그렇지 않았는데, 지금 자리 잡은 예술 터를 보고는 두사람의 마음이 딱 맞았다.

술 빚는 체험으로 예술을 두 번 다녀간 손님 중에는 이곳에서 야외 결혼식을 올린 이도 있다. 예술촌 카페에 그때의 사진이 크게 전시되어 있는데, 이화주가 익어가는 한옥 앞에서 야외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이 참 행복해 보인다. 하객들에게도 한동안 잊지 못할 장면이었을 것이다.

“술 빚는 일만으로도 벅차지 않으세요? 야외 결혼식에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하고, 교육 프로그램도 다양하고요. 예술은 하나의 브랜드로서 제품 패키지에도 시간과 정성을 담은 게 보여요. 한편으로는 마케팅을 잘하시는 것도 같고요.”

예술은 전국에서 손꼽힐 만큼 규모가 크다. 함께하는 직원들이 있다지만 공장식 양조장이 아니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사람 손이 거쳐야 술이 만들어진다. 그 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할 텐데 이곳만의 특별한 운영 방식이 있을 것 같다. 연한 황토색과 연둣빛의 생활한복을 입은 정회철 대표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기자의 질문에 답을 한다.

 

“벌써 십 년이 되었네요. 처음 양온소(예술에서는 양조장이라는 말보다 양온소를 지향한다)를 준비할 때부터 단순한 양조장이 아닌 유럽의 와이너리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4년 정도 되었고요. 아시다시피 와이너리는 관광지입니다. 술을 빚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과 함께 하는 공간이죠. 맛보고 즐기는 장소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저는 예술을 술을 홍보하는 차원을 넘어 전통술을 나누고 알아가는, 술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가꾸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양주로서 우리 술에 대한 개념과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국의 양조장이 소통하기 위해 문턱을 낮추고 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까지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시간은 필수적인 듯하다. 전국에 예술과 같은 공간이 늘어난다면 이렇게 맛있는 우리 술을 더 많은 사람이 알게 될 텐데…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우리 술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

“예술에서는 새로운 제품 개발을 위해 많은 공을 쏟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술이 있나요?”

사실 이 질문에는 사심과 공심이 섞였다. 예술에서 만든 모든 술을 맛볼 아니, 소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회철 대표가 2개 정도를 골라주면 지면에 실어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맨 처음 내어주신 술은 ‘무작53’, 지하 발효실의 옹기항아리에 그득그득 저장되어 숙성 중인 그 술이다. 기자는 3년이 된 무작의 맛을 봤다. 알코올 함량 53%라는 술이 이다지도 맑고 순수하게 넘어간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원래는 목이 타들어가고, 속도 뜨거워지는데 말이다.

 

“왜 이런 전통술이 한국인에게 좋다는 건가요?”

지금 와 생각해보니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술은 몸에 해로운 것, 술은 쓴 것, 취하려고 마시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아니, 지난번 술빚는 전가네부터 예술까지, 술맛이 어쩜 이래?’ 하고 놀랐던것 같다.

“우리 술이지만 아직도 전통주, 특히 증류주에 대해서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술맛을 모르니 증류주를 폭탄주로 만들어 먹고는 하죠. 그런데 사실 그건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안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한국 사람한테 맛있게 느껴지는 술은 따로 있죠.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과 자연누룩만으로 빚은 무작53과 같은 증류주는 체질적으로 한국인에게 잘 맞지요. 쌀에서 나는 고유한 향과 맛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깨면서 마시고 마시면서 깨고 즐기는 술입니다.”

그 다음에는 떠먹는 술, ‘이화주’다. 고려시대부터 빚어온 이화주는 양갓집 규수들, 노인들을 위한 보양 식으로 대접받았다. 예술에서는 ‘배꽃 필 무렵’이란 이름으로 잣, 유자, 오미자 세 가지 종류의 이화주를 내놓는다. 작게 떠서 입 안에 넣으면 은근히 씹히는 맛과 저마다의 풍미가 전해진다. 낯설어서 설레는 술이다.

벌써 마지막 술이라니? 세 번째 맛본 술은 ‘만강에 비친 달’이다. 예술에서 이 술을 소개하기로 ‘남녀노소 불문하고 술을 잘 못하는 사람들도 매료시키는 달콤한 맛’이라고 했는데 기자의 입맛에 딱 그랬다. 찹쌀과 단호박을 원료로 두 번 빚은 탁주가 혀에 안 떨어지고 착착 감긴다. 예술은 모든 술에 맛이 우수한 단일품종의 대한미를 햅쌀로 사용한다. 정회철 대표는 그 안에 싸라기 하나 허락하지 않는다.

 

“쌀이 깨져 있으면 발효하면서 가라앉아요. 항아리 아래에 하얗고 두껍게 깔리는 것이 깨진 쌀에서 나오는데 맛을 방해하지요. 그래서 따로 계약한 곳에서 한 번 더 거른 쌀을 받아와요. 물론 값은 비싸지만 술맛을 위해서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쉬었다 가요. 뭐 어떤가요

정성. 우리 술이 맛있는 이유인가 보다. 일주일에 50장 정도 빚는 누룩은 발효실과 법제실에서 약 5개월간 제맛을 들이는 시간을 갖고, 빚은 술은 옹기항아리에서 또 시간을 보내야 한다. 오밀조밀한 항아리의 숨구멍에서 산소와 완만히 만난 술은 시간이 갈수록 오묘한 향과 맛을 품는다. 정회철 대표의 안내를 받아 증류주가 담긴 옹기항아리, 이화주 발효실, 누룩실 등을 들렀는데 그때마다 깊은 산의 풀이며, 꽃, 흙으로 지은 할머니네 부뚜막 같은 냄새가 느껴졌다.

“참 좋다. 만강에 비친 달, 이름도 예술이네요.”

“이름 짓는 데 일 년 정도 걸려요. 일반인이 제품을 볼 때 제일 먼저 접하는 게 이름이잖아요. 이름만 봐도 호기심을 느끼고 먹어보고 싶게끔 하는 것이죠.”

참 철두철미한 분이다. 정회철 대표의 말처럼 예술의 제품은 이름부터 포장까지 허투루 나오는 법이 없다.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뜻한 바대로 이루고 마는 그의 고집이 그대로 느껴진다. 화려한 이력으로도 유명한 그는 서울대 출신 변호사, 충남대 법학대학원 교수로 활동했다. 그 당시 일을 하면서도 10년 동안 일 년에 열 권 이상의 책을 집필했다. 쉬어야 할 때를 잊은 몸과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 모든 것을 내려 놓게 되었다. 그때 취미로 시작한 술 빚는 일이 새로운 천직이 되었다. 또 다시 몸 상하는 일 없기를 바라는데, 그의 몸가짐에서 염려를 거둔다.
옹기, 증류기, 숙성 중인 누룩, 이화주, 무작53을 따라주는 손길에서 행복과 자부심이 번져 나온다. 우리 전통술의 매력은 그 술을 만드는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게 틀림없다. 그래서 술마다 맛이 다르다. 매력이 다르다. 아직 우리 술맛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슬프고도 기쁜 일이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으니 어서 드셔보세요. 기회는 아직도 충분합니다.”

 

정상미 사진 문덕관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