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도 멋도 그림 속에 들어왔다

가라앉아 있을 땐 미처 몰랐는데 ‘막걸리’ 하고 흔들면 비로소 제 색을 드러낸다. 아련한 기억들을 내 속에 쏘아댄다. 이런 술을 빚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짠, 한 번이면 풀어지는 작고 소중한 길을 걷는 마음으로 가고 쓰련다.

 

 

막걸리의 이미지, 아빠로 시작하는

왜 나는 막걸리를 한다고 했을까? 술맛도 잘 모르면서. 어떤 단어를 뱉었을 때 어떤 이미지로 굳어지는 게 있다. 막걸리가 그렇다. 막걸리는 맛과는 상관없이 나를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어린 시절로 데려가곤 했다. 아마 아빠는 종종 내게 막걸리 심부름을 시켰던 것 같다. 그 일이 또렷이 기억나질 않는 걸 보면 당시의 내게 흔하고 기꺼이 할 만한 일이었을 듯싶다. 아빠는 막걸리를 정말 좋아했다. 크림색 한 모금 정도의 찌꺼기가 남은 막걸리 빈 병이 현관 앞에 쌓여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매일 버리지 않고 그렇게 쌓아두었는지 모르겠다. 술고래임을 자랑하려고 그랬을까? 나는 아빠를 쏙 빼닮지는 않아 막걸리를 그만큼 마시는 어른이 되지는 않았으나 ‘막걸리ʼ 하면 무조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부류는 아니게 되었다. 오히려 푸근하다. 막걸리는 어쩌면 색도 그렇게 따뜻한 빛일까?

아마 그 원형이 우리네 주식이라서 그럴 것이다. 막걸리는 쌀과 물, 누룩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지 않은가. 쌀 없이 한국인이 어떻게사나. 막걸리는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술이다. 사설이 길다. 각설하고 이것이 ‘왜 막걸리를 취재한다고 했어?’라고 물을 때 내가 답할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다. 2019년 1월부터 전국의 양조장을 하나씩 다녀보기로 했다. 요새 많이들 쓰는 말을 붙이면 양조장 순례길도 되겠 으나 거창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이유가 그러지 않은 것처럼. 그저 방랑하는 마음으로 전국을 다니 는데 우연인 듯 우리 술을 빚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짠, 한 번이면 풀어지는 작고 소중한 길을 걷는 마음이다.

 

산정호수 이다지도 맑은 곳에서 술 빚는 남자, 전기보

내게는 오늘 내리는 눈이 첫눈처럼 생각되었다. 그전에 내린 눈은 집 안에서 맞이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눈을 맞으며 어딘가로 향하는 것은 올겨울 처음이다. 눈은 도로에 닿기 무섭게 녹았지만 차의 속도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왕 내리는 눈, 이왕 내디딘 거북이걸음에 초조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포천에 들어온 지 한참이 되어서야 산정호수로 335 ‘술빚는 전가네 주막’에 도착했다.

“아주 좋은 날을 골라 오셨네요!”

술빚는 전가네의 전기보 사장님이 넓은 앞마당을 쓸며 그제 만난 지인처럼 첫인사를 건넨다. 네. 정말 좋은 날입니다. 하얀 눈 받은 명성산 자락이 신비롭게 서 있고 세상도 온통 하얀데 그곳에 맛있는 음식과 가양주를 내놓는 주막이 있다. 이 어찌 아니 좋은 날이겠는가. ‘운치란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를 실감하며 주막 안에 들어갔다. 술은 주막 가까이에 있는 양조장에서 따로 제조하고, 술빚는 전가네의 술을 맛보거나 구매하려면 이곳 주막으로 오면 된다. 여기서는 든든한 한 끼나 발효음식 위주의 안주도 맛볼 수 있다.

전기보 사장님은 일평생 거침없이 살아온 분 같았다. 어투도 행동도 시원시원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꽃정식을 먹었는데 음식 맛이 정말 좋았다. 푸근한 미소의 아내가 주막을 책임지니 얼마나 든든하실까 했는데 한사코 본인이 주방장이라고 하신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인 분. 술도 잘 빚는데 음식까지 잘하다니 세상은 불공평하다. 확실히 전기보 사장님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술도 빚고, 주막에서 손님도 맞고, 강연도 나간다. 대기업 임원, 행복연구소 소장, 대학교수, 사진작가, 주막 주인, 양조장 사장. 각자 연관도 없는 일이 한 사람의 생에서 이뤄졌고, 그 삶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그는 현재도 강연을 다니느라 바쁘다. ‘어떻게 하면 막걸리를 잘 만들 수 있나?’가 아니고 ‘은퇴 후의 삶’이 강연의 핵심 주제란다. 특유의 욕심과 열정으로 발 담그면 빼는 일이 없으니 그가 밤을 새우고도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다.

누구나 나이를 먹는다. 그럼에도 하릴없이 나이만 먹음에 속상할 때가 있다. 옮길 자리도 없는데 내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주어야 한다니! 그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세상이 나를 어딘가로 떠밀고 있다는 오해 아닌 오해 속에 푸념하고 싶지 않다면, 전기보 사장님의 말을 들어보자. 약을 파는 게 아니다. 찰나의 인상과 감동이 내 삶을 결정하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여기 세워진 글의 줄에서 그대에게 새겨지는 한 줄이 있길 바란다.

 

친구가 그날 가방에서 꺼낸 게막걸리가 아니었다면

“돌이켜보면 나는 모든 일을 우연으로 시작했다. 일본여행을 가는데 비행기에서 카메라를 샀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열심히 찍으러 다녔다.

티베트, 부탄, 아프리카 등등 사진 전시를 9번이나 했는데, 저기 세계지도에 간 곳을 스티커로 붙여놓았다. (지도가 반짝반짝하다) 술 역시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다. 사진을 찍으러 중국 저장성에 갔는데 친구가 자기 배낭에서 막걸리 세 병을 꺼냈다. 직접 만든 술이라고 했다. 일명 가양주. 맛이 감동적이었다! 나도 이런 술을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교육하는 곳에 당장 전화를 걸어 이미 만석이라는 자리 하나를 용케 빼서 술을 배웠다.

말했듯이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했는데 열심히 하고 나니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다. (술빚는 전가네는 ‘2018 우리술 품평회’에서 탁주(濁酒) 부문 대상·우수상을 받았다) 당시 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교수를 하며 행복연구소를 운영했 고, 교수로 정년을 맞이하면 사학연금도 보장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강연을 가면 ‘좋아하는 일 하세요, 은퇴 후에 재미나게 사세요’ 하면서 정작 내 삶은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술 빚는 일을 사업으로 하리라 결심했다. 모두가 반대했다. 술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다고 해서 주막을 열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텨야 할 때 좋아하는 일이면 버텨낼 수 있다.”

 

비싸다고? 일단 한 모금 자시면 그런 소리 안 나오지

“술이 맛있게 되기 위한 여러 조건이있다. 우리나라 술의 재료는 쌀, 물, 누룩이다. 이곳은 철원평야 지역이라 좋은 쌀은 담보가 되어 있다. 그런데 막걸리의 맛을 결정짓는 것은 쌀보다 누룩이다. 보통 일반 양조장에서는 대량 생산을 위해 일본식 누룩을 쓴다. 일본식 곰팡이가 들어간 누룩, 술맛을 좌지우지하는 누룩의 맛이 종속되는 것이다. 나는 누룩의 독립성을 중요하게 봤다. 양조장 주인의 의지에서 나오는 독립된 누룩 말이다.

전가네 누룩은 우리 양조장에서 생성된 자연 곰팡이로 만들어진다. 당연히 우리 양조장에만 있으니 고유한 술맛을 낸다. 이번에 우리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은 ‘산정호수 동정춘 막걸리’는 조선 3대 명주의 하나인 동정춘(洞庭春)을 복원한 것이다. 술맛이 말로 표현이 안 된다. 워낙 맛이 달고 향이 진해서 특별 하다. 아시다시피 포천은 막걸리의 고장이나 다름없다. 백 년 가까이 된 양조장도 있고, 이동, 일동, 포천, 내촌 등 이름난 막걸리만 해도 몇 개나 된다. 그들의 역사에 비하면 전가네는 햇병아리 수준인데 이번에큰 상을 받아서 모두가 놀랐다. 나는 기적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술인지 궁금하다며 찾아온다. 처음에는 가격만 듣고 놀라기 십상이다. 슈퍼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막걸리에 비한다면 한 병에 1만5000원짜리가 비싸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원료가 다르다. 일단 손님들이 오면 아무말없이 한 잔 권한다. 다들 맛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래서 다르구나. 이래서 맛있구나’ 한다.

술 하나 만드는 데 12주가 소요된다. ‘궁예의 눈물’을 비롯해 상 받은 술 모두 이양주로 만들어진다. 밑술에 다시 덧술을 하여 숙성하는 것인데 쌀의 당화, 효모균이 생성되는 중요한 과정이다. ‘궁예의 눈물’은 쌀가루를 범벅으로 죽을 만들고 명성산의 억새를 즙을 내어 만든 술이다. ‘동정춘’은 일명 도넛, 구멍떡을 쪄서 밑술을 만들고 다시 고두밥을 넣어 덧술로 만든다. ‘쌀 흩임’ 기법이 들어가 까다롭고 구멍떡을 일일이 으깨는 일이 고되다. ‘배꽃 담은 연’은 밑술을 만들 때 이화곡을 넣는다. 쌀누룩과 찹쌀을 연잎에 쌓아 빚은 백주로 향이 좋고 맛이 묵직하다.”

 

다른 데서 파는 건 안 팔아요. 이유 있는 자신감, 우월함

전기보 사장님이 양조장에서 두 달간의 숙성기간을 거치고 있는 동정춘을 긴 국자에 담아 건넨다. 발음도 어려운 쌀 흩임 기법으로 만든 다는 동정춘이다. 조선 3대 명주라니 그 시대에도 아무나 마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입 머금은 순간 방금 들은 말들이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생긋 흘러나간다. 달큼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우는데 ‘술맛이 어떻게 이래요?’ 소리만 메아리친다. 동정춘은 지난해 5월까지도 라인업에 없던 술이었는데 이번에 대상을 받으면서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원래는 궁예의 눈물만 열심히 만들면 되었는데…’라는 전기보 사장님의 행복한 볼멘 소리가 이어진다.

재주가 많은 전기보 사장님은 새해에 세계 일주로 얼마간 주막을 비울 예정이다. 그런데 방송과 강연도쉴 생각이 없단다. 큰일이다 싶어 ‘주막을 비우면 동정춘은 어떻게 맛보느냐’고 손님들을 대신해 물었더니 “인터넷으로 살 수 있어요. 택배도 가능해요”라고 한다. 하지만 사장님이 안 계시면 누룩으로 만든 전가네 누룩전은 맛볼 수 없다. 각종 견과류를 넣은 누룩전은 색도 곱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감자전도 아니고, 호박전도 아니고, 누룩전이다. 흔치 않은 데다 맛까지 좋으니 반할 수밖에 도리가 없다. 산정 호수에 선녀가 내려온다면 코스로 전가네 막걸리와 누룩전을 꼭 먹고 다시 하늘로 가뿐히 올라갈 것만 같다.

그 옛날 궁예가 눈물과 한을 토했다는 명성산도 오르고 산속의 우물이라는 산정호수에도 들르고, 포천 특산물로 자리한 전가네 탁주도 꼭 드셔보시길. 막걸리로 새로운 추억이 써지는 건 일도 아니다.

정상미 사진 신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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