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거나 혹은 뜨겁거나, 함평

살을 에는 추위, 얼어붙은 바다 위로 나비는 날지 않는다.

그러나 뜨겁게 불타오르는 태양과 온몸을 녹이는 해수찜이 전라도 함평의 겨울을 묵직하게 채우고도 남는다.

 

함평으로 떠나는 날, 보일락 말락한 진눈깨비도 아니고 제법 큼지막한 눈 결정체가 하얀 꽃송이처럼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향기 가득한 국화는 이미 졌고, 살랑 살랑 나비는 봄이 돼야 찾아오겠지만 한겨울에도 함평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추위를 뜨끈하게 녹이는 해수찜이 있다 하니 그것부터 체험해 야겠다. 그다음엔 뭘 하지? 아니야, 굳이 여행 계획을 꼼꼼히 세울 필요는 없잖아.

겨울인데 느긋하게 돌아보는 보는 맛도 있어야지.

 

새벽을 여는 밀재

일출시각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오전 7시 37분. 겨울이라 해 뜨는 시간도 늦다. 함평 돌머리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아름답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오후 일정만 체크해 뒀는데 “밀재 일출도 예술이에요!”라는 숙소 주인장의 귀띔에 부랴부랴 기상 타이머를 설정했다. 전남 영광에서 함평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위치한 밀재는 사진작가들의 출사 포인트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밀재휴게소 팔각정에 오르면 함평 해보면 일대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평화롭고 잔잔한 농촌 풍경이다. 대지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큰 건물이 서넛 보이고, 누군가가 열심히 가꾸고 있을 논과 밭이 펼쳐진다. 태양이 고개를 들자 주변은 이내 붉은빛으로 물든다.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이 매일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해가 떴다고 끝난 게 아니다. 밀재의 아름다움은 첩첩산중 겹겹이 쌓이는 산이다. 산등성이를 타고 어떤 산은 진한 빛깔을, 어떤 산은 연한 빛깔을 띤다. 한 폭의 수묵화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밀재에서 함평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용이 승천했다는 천년 고찰 용천사가 자리한다. 전성기에는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곳으로 정유재란과 6·25전쟁 중에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복원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특히 쑥돌로 만들어진 높이 2.38m의 석등이 볼만하다. 거북 조각이 옥개석 네 귀에 달려 있는데, 아쉽게도 두 개는 부서지고 없다. 용천사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꽃무릇 군락을 이뤄 9월에서 10월 초까지 붉디붉은 꽃으로 뒤덮인단다. 가을에 이곳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시내로 빠져나가려는데 ‘잠월미술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시골에 웬 미술관?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들러보자는 생각에 가던 길을 멈췄다. 2006년 미술교사인 김광옥·임혜숙 부부가 지역 사람들에게 예술적 체험과 감동을 주기 위해 오픈한 미술관은 작고 아담했다. 무료로 개방하지만 매번 새로운 기획전을 열어 동네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개관 12주년 특별기획 ‘꼽 짜이 라오스’를 잇는 2019년 전시도 기대해보라는 친절한 미술관지기. 그가 봄에 다시 올 것을 권한다. 미술관 앞으로 데이지가 활짝 피어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진단다. 어머나, 봄에 이곳에 다시 와야 할 이유도 생겼다.

 

후끈 달아오르는 해수찜

한겨울, 함평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해수찜이다. 함평만 갯벌이 펼쳐지는 손불면 궁산리 일대에 들어서자 해수찜 간판을 건 집들이 여럿 이어진다. 현재 두 곳만 장사를 잇고 있는데, ‘세 번째 집’으로 통하는 주포해수찜으로 향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해수찜은 바닷물과 유황석, 쑥이 어우러진 ‘함평식 전통 사우나’다. 나무로 제작한 작은 탕에 게르마늄이 풍부한 바닷물을 가득 채우고, 소나무 장작불로 뜨겁게 달군 유황석을 넣어 바닷물을 뜨겁게 데워내는 방식. 여기에 주인장이 직접 키우고 말린 쑥까지 듬뿍 넣어주니 보약 못지않은 ‘약찜’이 된다.

바닷물과 유황석이 만나자 치익~ 소리를 내며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순간적으로 물의 온도는 80~90℃까지 치솟고 작은 방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증기가 가득 찼다. 뜨거운 기운이 쉬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볏짚으로 만든 가마니로 탕을 덮어주는 것이 포인트. 이제 커다란 수건을 뜨거운 물에 적셔 물기를 짜내고 목이나 어깨, 배 등 원하는 부위에 올려놓으면 된다. 해수찜이 처음이라는 말에 주인아 저씨가 손발을 걷어붙이고 손수 시범을 보였다. 능숙한 손놀림을 따라 어깨 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수건. 아, 평범하기 그지없던 연분홍 수건 한 조각이 이토록 위대할 줄이야. 뜨끈함이 어깨를 지나 온몸으로 퍼지니 추위 따윈 저 멀리 달아나고 없다. 해수찜은 보통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가 적당하다. 물이 식는 정도에 따라 손을 담그고, 발을 담그고, 이어 반신욕까지도 즐길 수 있다.

노곤노곤해진 몸과 마음에 함평의 맛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 함평에서 가장 유명 하다는 육회비빔밥을 먹으러 가보자. 함평은 116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시장이 있는 곳으로 ‘함평천지 한우비빔밥’ 음식테마거리도 조성되어 있다. 갓 잡은 한우를 재료로 사용했으니 육회비빔밥은 실패할 일이 없다. 두툼하게 썬한우 생고기와 갖가지 채소를 올리는 건 여느 비빔밥과 비슷하지만 한 끗 차이가 있다. 바로 곁들여 넣는 삶은 돼지비계다. 무채처럼 썬 하얀 돼지비계는 고소함을 더하고 감칠맛을 살린다. 육회를 좋아하지 않아 남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무색하다. 한 그릇 뚝딱, 깨끗이 비워냈다.

 

바람을 견뎌도 마냥 좋은 일몰

오후에는 주포한옥마을을 지나 석성리 석두마을 서쪽 끝을 어슬렁거렸다. 일몰이 아름답다 소문난 곳이라 일찌감치 좋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돌머리해수욕 장의 일몰 예상시각은 오후 5시 24분. 겨울이라 역시 해가 참 짧다. 6시가 되어야 퇴근하는 직장인에겐 허락되지 않는 일몰 시간이기도 하다. 바다를 향해 목재로 조성한 405m의 갯벌탐방로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바다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거친 바닷바람에 눈물이 찔끔 나고, 옷깃을 여미지 않으면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판. 몇몇 커플은 중도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살을 에는 추위를 참고 뚝심 있게 버텨낸 사람들에게 돌머리해수욕장은 매우 근사한 풍경을 선사한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듯 마지막까지 붉은 기운을 힘껏 뿜어내는 태양. 육지 끄트머리에 자리한 등대 뒤로 넘어가는 순간이 ‘절정’이다. 짙게 드리운 구름 탓에 일몰은 짧았 으나 괜찮다. 찰나이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다. 밀재에서의 일출을 시작으로 돌머 리해수욕장의 일몰까지 하루가 알차다.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뼛속까지 뜨끈해지는 해수찜으로 힐링했으며, 그동안 몰랐던 육회비빔밥의 맛까지 섭렵했다.

전남 함평으로 떠난 겨울여행, 아쉬울 것이 없다. 100% 성공이다.

 

김정원 사진 손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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